한줄 詩

어둠의 원본 - 김대호

마루안 2021. 4. 30. 21:41

 

 

어둠의 원본 - 김대호


어둠이 빛나는 한낮을 지나
어둠의 원본이 드러나는 밤이 온다
한낮에는 온갖 빛나는 것들 때문에 어둠이 훼손되었다
그 훼손된 한낮에 더듬거리며 일을 하고 더듬거리며
당신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당신의 눈빛은 밤과 잘 어울린다
밤에 만나는 당신의 허연 목덜미는 참 매혹적이다
나는 당신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한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당신은 빛에 찢어진 목청을 보수하느라고 가글을 한다
모든 영업이 끝난 이 밤에
밤의 속살을 얻기 위해 고요한 영업을 시작한다
아무것도 빛나지 않기에 당신의 음영이 뚜렷하다
사람이여
사랑이여
이 밤이 나의 최초라는 것을
이 밤이 나의 우화라는 것을
통속적인 것을 지나 아주 진지한 통속의 새벽을 기다리고 있음을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걷는사람

 

 

 



휘다 - 김대호


부서지기로 했지만 휘었다
언젠가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었지만 남루한 외투를 걸치고 걸어올
당신이 누군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많은 시련의 출처를 기록한 쪽지를 내게 건넬 것이다
"왜 이토록 잔인한 임무를 당신이 수행하나요"
"내가 당신을 가장 잘 아니까"
슬프고 기뼜지만 그 모든 일이 주술의 힘이란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죄
휠 것을 알면서 부서지겠다고 고백한 죄
모든 것이 흘러간 뒤 흘러간 그 모든 것을 복기해서 분류하는 수고가
길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넘어올 때 봉합된 부위가 있었다
그 자리가 수시로 아리다
무엇을 덮고 덮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봉합된 무덤들을 살짝 들추면 생살 냄새가 난다
아직 살아서 휘어 있다
압력은 세월이었다
아니다 나다

 

 

 

# 김대호 시인은 경북 김천 출생으로 2012년 <시산맥>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가 있다. 2019년 천강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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