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의 반 - 백인덕

마루안 2021. 4. 29. 21:26

 

 

생의 반 - 백인덕


최선을 다해 소진했지만
그런 적이 없었네.

세상 모서리
기어이 작은 유리조각이라도 찾아내
반짝이는 종말의 햇빛처럼

지금은 지금,
진자리에 돋는 싹도
최초의 문신처럼
자기 종말을 반사하며 빛나는데

얼굴을 닦았던 젖은 휴지로 책등을 문지르자
부스스 일어서는 못 자국들

의지는 살과 뼈의 결과
또는 허공에 결박하려는 마른 숨결

머리칼처럼 쉬 빠지는 페이지들을
검은 표정으로 굳게 움켜쥔
시흥 외진 인쇄소 절단기의 선명한 이빨 자국

최선을 다해 비틀거렸지만
빙그르 제자리,
마른 그림자만 짙어졌던
결코, 그런 적이 없었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문학의전당

 

 

 

 

 

 

여기와 지금 - 백인덕


슬그머니 왼팔을 드네
목성이 막 그쪽을 지나갔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네

흔들려도 중심은 없네
사실 죽음은 왼쪽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얼굴을 덮친다는
뒷골목 시궁창 같은 전언 탓,
애써 왼쪽을
아니, 양 미간을 힘껏 찡그려보네

삶의 위대함은 내일에 대한 무지에서 기초하는 것

방금 왼쪽을 스친 목성이
크리스마스처럼
이유를 모르는 축일을 향해
한 개, 사과만 한 돌을 쏘아 던져도

중심 없이 흔들리는 여기, 지금
아무도 멸종의 버튼을 눌렀다 생각지 않네
무료하거나 피곤한 어깨들이
제 중량보다 여린 환영에 기대 떠오르기만 할 뿐

슬그머니 들었던 왼팔을 내리네
이 행성에서 추억은
캄캄해서 뚜렷해지는 모순일 뿐

막 울음을 시작한 아이는
어떻게 삶의 위대함에 닿을까?


 


# 백인덕 시인은 1964년 서울 출생으로 한양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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