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 전장석

마루안 2021. 7. 18. 21:20

 

 

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 전장석


고갯마루를 마수걸이한 마을버스가
몇 사람과 접점하고는 내리막길로 이항한다
간판이 분필로 쓰인 책방은 방금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려던 중이다

​저녁 산책의 중력파가 만리동까지 미치면
거기, 작동이 멈춘 낡은 탁자 위의 시간들
수공(手工)이 되어 나를 내부 수리한다

무중력의 이 도시를 용감하게 횡행하던
한 권의 시집, 단 한 줄의 문장 속엔
궤도를 이탈한 소우주가 지구본처럼 떠돌고
평생 떨어진 사과를 줍다 허리 휜 내 이력이
통증이 가시지 않은 호롱불로 밤새 매달려 있다

막대그래프 같은 아파트와 낮은 곡선의 지붕들
그 아찔한 간극에서 자주 멀미하던 바람이
서점 어딘가에 불편한 기록으로 꽂혀 있다는데
언제쯤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불구의 시간들이 버릇처럼 그리움으로 발화되면
나는 또 책갈피 속 언덕 마을을 찾아갈 것이지만

식어가는 계절의 밧줄을 놓지 않고 있는 담쟁이덩굴이
태양의 인력(引力)을 증명하듯 무서운 발톱을
금 간 담벼락에 양각한 만리동
담력이 약한 짐승 한 마리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언젠가 굴레방다리 아래 가을비로 뚝뚝 떨어져
변곡점이 된 기억 하나

만유인력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시집/ 서울, 딜큐사/ 상상인

 

 

 

 

 

 

BOOK아현 - 전장석


숨이 찰수록 뜻이 달아오르는 문장
동네 어르신들에겐 난독의 보릿고개다 
앞뒤 표지가 뜯겨져나간 동네
그날그날 표지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록 몇 장 부욱 찢겨져도 눈치채지 못한다
숙박계 대신 쓴 무명씨 저자의 방명록은 
얼음의 구근이 녹아 흘림체 일색이다 
아직 지구상에 남아 있는 몇 개의 구절은
이 동네의 밤하늘을 뒤적거리다가 
마지막 페이지쯤에서 그냥 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덮어도 조여 오는 어두운 골목길
스스로 문장 속으로 들어간 책은 
어느 중고서점에서 절판인 줄 모르고 꽂혀 있고
갈라진 벽 속의 풀꽃들은 목차를 버린 지 오래
두 손으로 이마를 짚던 달이 
잠시 난독의 계단에 앉아 있는 동안
낡은 진열장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동네
쥐들이 갉아먹은 침묵 속엔 
수백 권의 장서가 우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

 

이것은

 

서울이라는 자궁 속에서 그린

무형의 지도다

 

손이 아니라 발로 더듬거린

어떤 거처에 대한

독백이다

 

시간의 금줄을 밟은

장소가 객사한

 

어느 날의 꿈속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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