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건너와 너머 - 최준

마루안 2021. 7. 16. 21:45

 

 

건너와 너머 - 최준


산을 읽었다 아니,
산을 가뒀다 지난가을
단 한 번 간 주말 산행에서
나는 산을 비웃었다
칼라 문신을 전신에 새긴 산의
정적을 답보하면서, 우스웠다 어제 내린 비로
산은 속이 좀 상했던지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어야 했지만
지상에 남아 있는 우산이나 우비는 더 이상 없었다

머지않아 옷 벗고 추워져야 할 텐데
문장의 끝에 있어야 할 마침표가 
올해도 안 보였다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할 것만 같았는데
없는 것이 있었다
산의 머리맡에서 쉼표 하나 겨우, 황급히 찍어 놓고는
갔던 길을 다시 돌아 내려왔다

더럽게 예의 없다고, 
신고 갔던 운동화가 투덜거렸다
숨 가삐 올라갔던 그게 산이었는지, 아니면 
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별들의 서식처를 여전히 염탐하고 
버릇없는 그들의 운행을 부러워하고
생각하고, 고민한다 눈 내린 다음 날 
밤에만 떠오를 달에 대해
내일의 폭설을 다시 허락할지도 모를
태양의 너그러운 운행에 대해

오늘도, 오늘은 
오늘이 없어서 무사하다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오래된 밥 - 최준


말로 자라는 아이와
밥으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
밥 먹은 아이는 엄마에게 말을 뱉어내고
엄마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밥이 만드는 말을
하루 세 번씩 하얗게 씻어 안치는 엄마
어제는 공룡을 만든 아이가
오늘은 나무를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새를 만든다
아가야 너 언제 세상을 다 만들래
엄마는 참 오래도 기다리는구나
대견하구나 이 많은 말들을
한 숟갈에 퍼 담다니!
엄마의 말을 다 먹으면
더 이상 엄마가 없을 아이
아이에게 다 먹이면
아이를 영영 잃어버릴 엄마가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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