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신통한 처방 - 조항록

신통한 처방 - 조항록 무지개약국 약사가 하루를 삼등분한다 살진 손가락 탓에 왠지 어설퍼 보이지만 그의 솜씨는 능란하다 습자지 두께로 복어회를 뜨는 옆가게 노련한 주방장의 칼질 못지않다 삼등분한 하루를 하루치 또는 이틀치 봉지에 담는 그의 표정은 모든 적의를 누그러뜨리고 있다 미소까지 지으며 그의 이르기를, 나이 들어 외롭지 않으려면 병과 친구가 돼야 해요 위장이 쓰리도록 약을 먹어보았자 치유되지 않는 결코 내성이 생기지 않는 어떤 아픔들이 있어요 그는 선사(禪師)처럼 말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졌으나 궁리하듯 돌이켜보면, 그간 여러 병이 나를 문질러댔어도 병을 떠나보낸 건 약이라기보다 세월이었다 나는 식후에, 실은 그가 처방한 세월을 먹고 이불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푹 쉬어야 한다 *조항록 시집, 근황,..

한줄 詩 2013.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