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신통한 처방 - 조항록

마루안 2013. 12. 2. 23:03

 

 

신통한 처방 - 조항록

 


무지개약국 약사가 하루를 삼등분한다
살진 손가락 탓에 왠지 어설퍼 보이지만
그의 솜씨는 능란하다
습자지 두께로 복어회를 뜨는 옆가게
노련한 주방장의 칼질 못지않다
삼등분한 하루를 하루치 또는 이틀치
봉지에 담는 그의 표정은
모든 적의를 누그러뜨리고 있다
미소까지 지으며 그의 이르기를,
나이 들어 외롭지 않으려면 병과 친구가 돼야 해요
위장이 쓰리도록 약을 먹어보았자 치유되지 않는
결코 내성이 생기지 않는 어떤 아픔들이 있어요
그는 선사(禪師)처럼 말하는 이상한 버릇을 가졌으나
궁리하듯 돌이켜보면,
그간 여러 병이 나를 문질러댔어도
병을 떠나보낸 건 약이라기보다 세월이었다
나는 식후에, 실은 그가 처방한 세월을 먹고
이불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푹 쉬어야 한다

 


*조항록 시집, 근황, 서정시학

 

 

 

 

 


근황 - 조항록
 


어떻게 살아요


그냥,
많은 것
포기하면서 잊으면서,
쏜살같이,
차갑게,
해묵으면서 시큰해지면서,
세상의 모든 굴욕에 연민을 느껴
8월의 저녁에
눈이 나리고 눈이 나리고
눈사람이 되어가면서,


그래요
어떻게든 살겠죠
묻는 당신도

 

 

 

 

# 조항록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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