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낯도 안 붉히고 - 정양

마루안 2013. 10. 12. 22:17



낯도 안 붉히고 - 정양



남보다 비위 없어서
낯간지러운 짓이 어려웠지만
먹성으로는 남보다 비위가 좋아
비린내가 나든 노랑내가 나든 말든
씹히는 것이라면 나는
못 먹을 게 없었다


튼튼하던 그 비위도
하릴없이 약해졌는지
나이들면서 온갖 비린내들이 역겹다
비린내가 그렇게 많은 줄을
미처 몰랐다 나이들수록
가리는 것이 점점 늘어난다


가리는 것들이 늘면서부터
생각해보니 없던 비위가 또
슬슬 늘고 있다
마이크 잡고 노래도 하고
부끄러운 짓 낯두꺼운 짓
진땀나는 짓 닭살 돋는 짓
그런 짓들을 나는 예사로
낯도 안 붉히고 해치운다


비위 약해지는 건 불행한 일이다
비위 느는 건 더 불행한 일이다
안 가려도 좋은 비린내를
일삼아 가려가면서
가릴 것들을 제대로 못 가리고
낯도 안 붉히고 나는 늙는다



*시선집, 눈 내리는 마을, 모아드림







 

선술집에서 - 정양



추위타는 창가에 앉아
갈매기도 없는
저무는 바다도 훑어보고
담배연기로 동그라미도 만들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을 아줌마가
한가해지기를 기다린다
고운 때 대충 가신 아줌마에게
소주 한 병 더 시키고
나에게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아 주기를 기다린다
건성으로라도 무엇을 물어온다면
무엇이든 열심히 말하리라
물어보는 그것이
한평생 감추고 사는 것일지라도
한숨 섞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한숨 쉬는 대목은 부러뜨려 술을 권하고
덩달아서 길게 한숨을 쉬리라
이 세상 끝까지 상관하고 싶은 한숨을 쉬면서
내 진실과 그늘
아름다움과 슬픔과 그리움과 절망과 고통들을
죄다 털어놓고 말리라
이 세상 끝까지 다 저물기 전에
아줌마가 어서 한가해 지기를 기다린다






# 등단 30년 동안 발표한 시들 중에서 시인이 간추린 시선집이다. 시들 중에는 차라리 쓰지 말았더라면 싶은 것들이 나이 들수록 자꾸 짚이곤 했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것들이 때론 못 견디게 가려워서 가끔씩 잠을 설치기도 했단다. 시선집에는 고치고 다듬고 제목도 바꾼 시들이 여럿이다. 시선집에서 두 편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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