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환관의 무덤 - 문동만

마루안 2014. 1. 6. 21:27



환관의 무덤 - 문동만



아파트 부지를 파헤치다 무덤 수백 기가 드러났다
환관 내시들의 무덤이라고 추측되었다
그들은 거세되었지만 발굴되었다
거세의 권능을 지녔던
왕의 성기는 어디서도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떼무덤은 낙관의 징표
단절되지 않는 왕은 없다고
모든 뼈다귀들은 똑같다고 약설하는 것이다


비석치기라던가
봉분 위에다 여자를 눕히는 자들도 있고
무덤을 들춰 밥벌이를 하는 도굴꾼들도 있다
무덤을 옮겨 일당을 맞춰야 하는 포클레인 기사도 있고
청약 통장을 들고 무덤 위에 들어설
새집을 기다리는 성실한 가장의 시간도 있다
한 사람이 실존을 견디다 못해 십오층 베란다에서
담뱃불인양 낙하하는 그만큼의 시간이
지금 발굴된 무덤 위에도
입주와 동시에 장만한 장롱 위에도 똑같이 흘러간다
시간만큼은 수평이어서 지나치게 적나라한 평등이어서
나는 생활을 위안하기도 하고
지지하지 않는 자가 왕이 된 것도 서러워하지 않는다



*시집, 그네, 창비



 





어떤 음계에서 - 문동만



자주 자는 집은 컨테이너이거나 달세를 주는 여관방,
자주 먹는 밥은 함바집의 백반이었던 그가
삼십 년 객짓밥으로 얻은 만년 셋방에 곰팡이꽃을 피워놓고
밥상을 차려 기다렸다
늘 막막했던 그가 용돈까지 쥐어준다
'아무려면 혼자 사는 내가 낫지'가 그의 잠언
창을 열면 집 밖도 실내인 작은 집
소소한 몇 개의 반찬 냄새는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빗방울은 허공에 걸린 거미줄을 튕긴다
이십오 년 된 창고형 상가를 털어 칸칸이
허술한 담을 쌓고 그것을 아파트라 부르는 곳에
그가 살고 있다 그는 살 수 있었다
그가 만든 수많은 집들의 바깥에서만
빗방울을 견디는 거미줄, 오로지 가볍고 질긴 장력으로
살았던 탁음이 깊은 말라깽이 사내의 집
복도엔 그만그만한 사람들의 생이 얽힌 물발자국
발바닥으로 부르는 노동가, 따라 부르기 버거워
어떤 음계에서 나는 미끄러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