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 이상국 먼 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 이상국 어느해 봄 그것도 단 한번 신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한 다음부터 나는 갑자기 늙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햇살 좋던 봄날 아침의 아무것도 아닌 실수였는데 그 일로 식구들은 나의 어딘가에서 나사가 하나 빠져나갔다고 보는 .. 한줄 詩 2013.10.05
풍경의 깊이 - 김사인 풍경의 깊이 -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한줄 詩 2013.08.24
호박등 - 황지우 호박등 - 황지우 젊은 나이에 암수술을 한 친구를 문병갔다 온다. 그는 이미 알아챈 듯, 질린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 앞에 다가오는 巨한 그림자에 그의 신체 일부가 들어가고 있었다. 내 손에 놓인 그의 손, 짜식, 어린 시절 우리는 이 손 잡고 산으로 들로 쏘다.. 한줄 詩 2013.08.23
이사, 악양 - 박남준 이사, 악양 - 박남준 결국 남쪽 악양 방면으로 길을 꺾었다 하루 종일 해가 들었다 밥을 짓고 국 끓이며 어쩌다 생선 한 토막의 비린내를 구웠으나 밥상머리 맞은편 내 뼈를 발라 살점 얹어 줄 사람의 늘 비어 있던 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따금 아직도 낯선 아랫마을 밤 개가 컹컹거리.. 한줄 詩 2013.08.20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 - 김점용 외설적 아버지의 시대 - 김점용 죽은 아버지를 꺼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어떤 중년 사내가 끼어들어 같이 찍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폼만 잡았다 아버지와 나는 꼭 쉰 살 차이라 중간을 채우는 게 더 자연스럽지만 부재중인 사진사를 대신하여 타이머에 맞춰 찰칵 눌러도 중년의 사내는 찍히지 않았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어두컴컴한 무덤을 배경으로 어깨에 손도 얹고 치즈 흉내도 내면서 필름 한 롤을 다 쓸 때까지 이래저래 포즈를 취했는데 이번에도 중년은 한 컷도 잡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나여서 중년의 사내가 사진관 주인인지 배다른 형인지 잘못 꺼낸 젊은 시절의 아버지인지 알 수가 없어 언제 나갔는지 그가 사라진 뒤에도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 한줄 詩 2013.08.17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 이승희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 이승희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한줄 詩 2013.08.16
귀갓길 - 원무현 귀갓길 - 원무현 오늘은 혼자서 막창집이다 벼랑 끝에 서 있어도 웃을 수 있게 했던 것은 무엇이냐 다들 근무 중인 낮부터 비우던 잔술로는 해답이 멀어 병째 들이키다 보는 낡은 액자 속 문구 '희망의 싹은 절망의 땅에서 돋는다' 앞날이 아뜩할 때마다 삼키던 저 독한 의지 언제부터 유.. 한줄 詩 2013.08.16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 한줄 詩 2013.08.10
사랑은 어디에서 우는가 - 김사이 사랑은 어디에서 우는가 - 김사이 재개발도 안 되고 철거만 가능하다는 곳 삶이 문턱에서 허덕거린다 햇살은 아무것이나 붙들어 들어갔다 뺏다 하고 선과 악이 날마다 쌈박질하며 그 속으로 더욱 궁둥이를 들이밀고 달아나려 매번 자기를 죽이면서도 눈을 뜨는 내 바닥 불륜의 씨앗이 작.. 한줄 詩 2013.08.06
무서운 나이 - 이재무 무서운 나이 - 이재무 천둥 번개가 무서웠던 시절이 있다 큰 죄 짓지 않고도 장마철에는 내 몸에 번개 꽂혀올까봐 쇠붙이란 쇠붙이 멀찌감치 감추고 몸 웅크려 떨던 시절이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비가 된 나는 천둥 번개가 무섭지 않다 큰 죄 주렁주렁 달고 .. 한줄 詩 2013.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