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몸 - 정일근 세월의 몸 - 정일근 할머니는 부러졌다 붙은 뼈의 통증으로 비가 올 것을 아셨다 살 속에 숨은, 볼 수도 없는 뼈의 미세한 떨림으로 하늘의 움직임을 주술사처럼 예언하셨다 어린 시절 나에게 할머니의 몸은 일기예보 운동회나 소풍 전날의 설레는 밤이면 할머니 곁에 누워 내일의 일기를.. 한줄 詩 2015.11.02
가로등이 켜질 때 - 윤의섭 가로등이 켜질 때 - 윤의섭 해가 지고 길 잃은 햇빛 부스러기 힘없이 파닥거릴 즈음 낮과 밤이 몸을 섞다 서서히 뒤바뀌는 그 즈음 가로등은 일제히 외눈을 밝히고 줄지어 선다 이 외눈박이 외계인들은 오래전부터 길가에 죽은 듯이 서 있다가 구부정한 허리로 지상을 내려 보며 문득 눈.. 한줄 詩 2015.11.01
단풍 - 이선영 단풍 - 이선영 나는 더 이상 푸르러지지 못하리라 내 몸 속에선 잎들이 와글와글 끓어오른다 남는 것은 갈수록 되레 진해지는 분노라서 짙어지는 상처라서 참지 못하겠다고 잎들이 내 살갗을 뚫고 숭숭 돋아나온다 불거진, 붉은 이파리들 잔뜩 내뱉은 이 나무가 안에서는 폐허를 만들고 .. 한줄 詩 2015.10.31
그날의 배경 - 김경미 그날의 배경 - 김경미 몇날이고 수도승처럼 눈만 감다가 모처럼 나섰다 나서다가 누군가가 머리에 박은 10센티짜리 대못을 꽂은 채 떠도는 고양이 뉴스를 봤다 빼려고 얼마나 부볐는지 핏속 못이 조금 헐거워졌다고 했다 사람이 동물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정한 모.. 한줄 詩 2015.10.30
가을밤엔, 한 번쯤, 그 길을 - 박종해 가을밤엔, 한 번쯤, 그 길을 - 박종해 귀뚜라미 그 조그마한 것들도 밤새워 울어 대는데 내가 어찌 잠들 수 있겠습니까 귀뚜라미 편에 이메일을 띄웁니다 밤새워 귀뚜라미들이 문자판을 두드리는군요 "그립습니다. 그립습니다."라고 달이 구름의 속살을 비집고 나와 빙긋이 웃는군요 당신.. 한줄 詩 2015.10.29
절벽에서 - 이성목 절벽에서 - 이성목 바람이 가지에 맺힌 꽃봉오리를 풀어 주었네 저물다가만 저녁 어둠에 슬쩍 밟혔을 길이 비명에 휘어져 있었네 세상의 가파름이 나를 불러내었네 죽음도 이곳에선 사소한 일이었을 텐데 한 순간에 뒤바뀌는 바람이었을 텐데 그대 오래도록 한 무더기 꽃 움켜쥐고 있었.. 한줄 詩 2015.10.28
지상의 가을 - 심재휘 지상의 가을 - 심재휘 보세요 당신 무엇인가 절정에 이른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제 속의 빛들을 온 힘으로 소진하는 저 나무들의 붉고 찬란한 예감 가을은 치명적으로 깊어만 가는데 내 어린 딸은 저렇게 즐거워도 되는 건가요 지상의 가을은 마지막 가을인 듯 지독하게 단풍 드는.. 한줄 詩 2015.10.27
마음을 얻는다는 것 - 엄원태 마음을 얻는다는 것 - 엄원태 십년이 넘는 공부 끝에야 암컷의 마음을 얻어 교미할 수 있는 새가 있다 코스타리카의 긴꼬리매너킨은 탱고 스텝의 달인들 그들의 일생은 가무(歌舞)에 바쳐진 셈 소년 매너킨은 생후 오년째부터 스스로 연마하여 몸을 만들고 육년째도 여전히 독학으로 노.. 한줄 詩 2015.10.21
황혼에 취해 - 조길성 황혼에 취해 - 조길성 황혼이 내리면 그림자가 자란다 잊었던 슬픔을 꺼내 먹으며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면 이 세상 가장 떨리던 그날이 생각나 닫힌 입술을 열던 저녁이 그 아이 속눈썹 닮은 땅거미 거뭇거뭇 돋아 오를 때 기러기 울어 가을 깊던 그 골목 다시는 오지 않으리 골목 끝.. 한줄 詩 2015.10.21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 허연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 허연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가 관절에 힘을 쓰며 정지 동작으로 서 있었고 새벽 출근길 나는 속이 울렁 거렸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전진 아니면 후퇴다. 지난 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 한줄 詩 2015.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