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날의 배경 - 김경미

마루안 2015. 10. 30. 00:50



그날의 배경 - 김경미



몇날이고 수도승처럼 눈만 감다가 모처럼 나섰다
나서다가 누군가가 머리에 박은
10센티짜리 대못을 꽂은 채 떠도는
고양이 뉴스를 봤다
빼려고 얼마나 부볐는지
핏속 못이 조금 헐거워졌다고 했다 사람이 동물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정한 모임 속 네가 갑자기 내 머리에 못을 박았다
그 대못 얼버무리려 괜한 웃음을 웃느라
이마와 코가 헐거워졌다,
너무 가깝거나 멀어 몹쓸
사이도 아닌데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는데도 뺨으로 눈썹이 흘러내렸다
나는 확실히
사람과 잘 안 맞아 어떻게 사람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죽은 척하는 순간
고양이가 내 두 손을 지목한다



*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질 - 김경미
개작



어머니는, 옷은 떨어진 걸 입어도 구두만큼은
비싼 걸 신어야 한다 아버지는, 소고기는 몰라도 돼지
고기만큼은 최고 비싼 질을 먹어야 한다
그렇다 화장하다 만 듯 사는 친구도, 생리대만은
최고급이다 먹는 입 하찮아도 칫솔에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 누구는 귀를 잘라 팔지언정 음악만은 기어이 좋은 걸 산다
다들 세상의 단 하나쯤은 질을 헤아리니


그렇다 라일락꽃들의 불립문자 탁발의 봄밤 혹은 청색
다도해의 저녁 일몰이야말로 아니다 연애야말로 삼각
관계야말로 진정 질이 전부이다 고난이야말로 매혹의
우단 벨벳 검은 미망인 기품으로 잘 지어 입혀야 한다
몸이야말로 시계를 꺼낼 수 없는 곳 영혼이든가?
기도야말로
그렇다! 품종이 좋은 하늘을 써야 한다 관건은, 가장 비싼 것 하나쯤엔 서슴없이 값을 치르니
귀함이 곧 가장 싼 셈, 목숨만큼은 정말 제대로 값을 치르라고


다 쓴 이쑤시개처럼 봄 햇빛들 쏟아지는 오후
싸구려 플라스틱용품들 한없이 늘어놓아진 봄길에
값이여, 말 너무 많이 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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