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얼음잠을 자고 - 이현승

마루안 2022. 1. 25. 22:13

 

 

얼음잠을 자고 - 이현승

 

 

백 년 뒤에 깨어나기 위해 얼음잠을 자는 사람처럼

우리에게 버거웠던 건 늘 미래가 아니다.

 

지금 고칠 수 없는 병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죽음

언제나 당대가 문제이고

당대는 문제인 한에서만 당대인 것이다.

 

질문은 여전하다.

새로운 몸을 받아도

백 년 전의 영혼으로

백 년의 고독과 그보다 더 무거운

상실을 견디면서 물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질문은 여전할 것이다.

두리번거리는 나의 버릇을

아무리 밀어내도 고여오는 불안과 우울을

어떤 것도 다 가능해지는 환멸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땅과 죽음이 지금의 증언자이다.

ADHD와 조현병과 사이코패스가 시대정신인 것처럼.

 

나는 누구일까?

대답은 욕망에게 들어야 하고, 유감스럽게도

내가 누구인지는 포털과 유튜브의 인공지능이 더 잘 알고 있다.

나는 백 년간의 얼음잠에서 깬 사람처럼.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회복이라는 말 - 이현승


병실에서 시간은 느리게 간다.
풍경 발명가들은 하릴없이 창밖에나 눈을 준다.
그가 해시계 발명가로 업종을 바꿀 즈음
창밖 오후의 해가 나무의 그림자를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옮기는 것이 보인다.

회복 병실은 고요하다.

그래서 자꾸 수액 떨어지는 것에 눈을 주게 된다.
똑, 똑, 똑, 지워지는 소리들
잠든 사람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눌린 페트병의 힘겨운 복원력 같은 것을 생각한다.
밟혀 짜부라진 페트병 같은 것을
신이 지그시 밟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목숨을 건 전투에서 생환한 사람들이 그렇듯
두려움과 고통과 절망적인 외로움이
살아남는 것의 대가로 주어진다.
비명이 빠져나간 자리를 들숨이 황급히 메우듯
얼마간 두려울 수 있음이 더 살 수 있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회복이라는 말은 아직 아프고 더딘 말
풍경에 마땅한 소리를 매다는 하느님의 노동을 이해하는 시간
발에 채인 돌멩이가 하느님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