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만약이라는 약 - 오은

마루안 2018. 1. 17. 22:07



만약이라는 약 - 오은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바지에 커피를 쏟지 않았더라면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좋아했다면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했다면
국어사전보다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새벽보다 아침을 더 좋아했다면


무작정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너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닦아 주는 데 익숙했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데 능숙했다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하루하루를 열고 닫지 않았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불고
읽다 만 책이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시집,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








질서 - 오은



늦은 사람들은 신호를 위반하고
늙은 사람들은 법을 위반하지
그들이 법이기 때문에
자기 부정은 자기 갱신으로 거듭나지
법전에는 예외 조항이 늘어나지
넥타이가 점점 짧아지는 동안
목이 졸려 숨 막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지
말은 물 같고 성격은 불 같아서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 수 있었지
흐를 때와 고일 때를 잘 알아서
자기 비하는 겸양지덕으로 둔갑하지
덕은 떡처럼 도타워지지
없이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식으로
법이 설령 중립적일 때에도
법전은 이미 중의적인 문장을 쓰고 있었지
들이받는 게 아니라 들이치는 식으로
사고(事故)로 위장한 채 사고(思考)를 치며
갑남(甲男)을 물들이며 을녀(乙女)를 불붙이고 있었지
하나밖에 없어서 입은 틀어막기 쉬웠지
신호는 빨간불에서 좀체 바뀔 줄을 몰랐지
법은 관습법처럼 굳어졌다가 악법처럼 활개를 쳤지
이윽고 늦은 사람이 늙은 사람이 되었을 때


그릇된 것은 죄다 그릇이 되어 있었지
철옹성처럼 단단해서
섣불리 두드릴 수도,
진흙처럼 물러서
선선히 발 담글 수도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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