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위 닮은 여자들 - 이봉환

마루안 2018. 1. 16. 18:57

 

 

바위 닮은 여자들 - 이봉환


물기만 살짝 젖어도 반짝이는 조약돌이었던,
그 좋은 한때가 벌써 오래 전에 졸졸 흘러가버린
여자들 대여섯이 계곡물에서 텀벙댄다
나는 아들만 일곱을 낳았어 이년아!
일곱이면 뭘 해 영감도 없는 것이?
까르르 웃음보 터지고 물방울들 바위를 구른다
아직도 그렇게 반짝이던 생이 남아 있을라나?
바위를 닮은 여자들 가랑이 사이에
검푸른 이끼가 끼어버린 여자들이, 풍덩
뛰어들면 금세 거무튀튀해지는 바위들이 계곡에서
삼겹살에 상추쌈에 대두병 소주를 맛나게 마시고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날리거나 말거나
아카시아 숲 속으로 꽃마차가 달리거나 말거나
보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바위들이 낮술에 취해
물속에 가랑이를 터억 벌리고 누워 있다
영감 그거 있어봤자 성가시기나 하지 뭘 해?
그래도 등 긁어주는 건 그놈뿐이여 이년아!


*시집, 밀물결 오시듯, 실천문학사


 

 



김 씨네 집안 한 볼때기 사건 - 이봉환


설 전날, 사 대가 함께 모여 사는 김 씨네 집에서는 음식 장만하느라 하루해가 푸짐하다. 칠십 다 된 맏며느리는 전을 지지고, 손주며느리는 마당 한켠 절구통에서 사내와 떡을 친다. 사내가 철부덕, 하고 메질을 하면 손주며느리는 손에 찬물을 훌 적시고는 그 뜨건 떡살을 뽀그작, 주물러 뒤집는다.
김 씨네 집안 망백의 할아버지가 뒷짐 지고 이 흐믓한 광경을 돌아보신다. 철부덕 뽀그작, 철부덕 뽀그작, 그 소리 듣기 좋아 한참 절구통을 들여다보신다. 저런, 할아버지가 떡살이 자시고 싶다고 짐작한 손주며느리는 주무르던 떡살을 한 줌 가득 떼어 주먹과 함께 불쑥 내민다.
"엣씨요, 할아부지 한 볼때기 하실라요?"
"아니다, 한 볼때기씩은 니들이나 해라잉."
때마침 서녘 하늘엔 노루 꼬리만 한 겨울 해가 뽈그름히 젖는다.

 




*시인의 말

그대를 얻었으므로
시는 버리리라, 했는데
꾸물거리며 돋아난 것들이 있어
20여 년 만에 시의 집을 다시 짓는다.

그대 덕분이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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