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이 되돌아설 때 - 김명철

마루안 2018. 2. 16. 20:31



바람이 되돌아설 때 - 김명철



대림철공소 마른 쇠 깎는 소리에 묻혀
오토바이 한 대 소리없이 지나간다
늦은 겨울은 가로수 나뭇잎을 온전히 말아올리고
중학생 둘이서 책가방을 돌리며 간다 그 사이로
관광버스와 그 뒤편 장의행렬 차창마다
바람 한 점 없이 햇살의 반사가 눈부시다


밤새 침대 모서리가 긁혔다
불면의 버릇으로 떼어낸 살갗의 죽은 부스러기들이
눈과 허리에 박혔다
깎인 뼈와 깎이지 않은 뼈의 길이를 재면서


그래, 나에겐 아무도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쇠 깎는 소리에 묻혀
또다시 오토바이 한 대 급히 지나가고
단 한 번의 마지막 눈꽃축제를 생각한다


담담히 죽어가던 잔설 속 나뭇잎들과
밤새 바람 불던 내 가슴 사이를 무단횡단하며
새 한 마리가 유치하게 날아간다, 해도


눈 닿는 곳마다 생사가 걸릴 것이다



*시집, 짧게 카운터펀치, 창비








육교 위, 천공(穿孔) - 김명철



구름과 자동차들의 정체 사이에서
새 한 마리 황급히 방향을 꺾는다 빌딩 모서리와
갑작스러운 통유리창의 출현에 시야를 트지 못한다


집이 없는 나와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잿빛 레깅스의 여자와 퉤, 침 뱉는
머리 희끗한 남자 사이를 새는
다리를 한껏 움츠려 가까스로 빠져나간다
가느다란 보랏빛 목덜미가 선명하다


반만 펴진 새의 꽁지를 거칠게 지우며 육교 위로
하늘이 무너져내린다


줄지어 떠오르는 가로등을 따라
읽히지 않는 네온사인과 진짜 같은 별들과
피뢰침이 박힌 십자가들이 켜진다


솟아날 구멍이 없다는 생각 속으로
육교 난간을 잡은 손가락들의 뼈마디 속으로
무감각하게 비가 내린다
기온보다 더 빨리 체온이 떨어진다


비는 눈으로 바뀌어가고
나에게로 하늘이 하얗게 내려앉는다
쫓겨난 어둠이 모두 내 안으로 들어온다






# 김명철 시인은 1963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서울대 독문과와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짧게, 카운터펀지>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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