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인생의 오후에 - 홍윤숙

마루안 2018. 2. 16. 09:39



인생의 오후에 - 홍윤숙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고
어느 젊은 시인은 노래하는데
그 시인 오후는 언제쯤일까
서른은 너무 일러 아닐 터이고
지천명의 쉰은 좀 늦은 것 같고
아마도 불혹의 나이 마흔쯤일까


40대, 마흔 그런 시절도 내게 있었던가
전설 같은 신화 같은 하늘의 별 같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생의 한복판
그 시절 나는 어디서 무슨 일 하고 있었나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구름 속 아득한
그때는 그리운 어머니도 살아계셨지
올망졸망 색동 같은 아이들도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으로
새록새록 푸르고 새말갛게
내 하늘 별이 되어 팔랑거렸지


이제 떠나간 별들의 이름이나 부르다가
떠나온 산천 가슴에 그리다가
눈감으면 고향 가는 기찻길
경의선 보통열차도 달릴 것 같고
정주 고읍古邑 외가로 가는 길도
환히 떠오르고....
짙푸르고 싱싱하던 마흔 그 시절
지금 어느 산굽이 돌아 길 잃고 헤매 도는지
돌아보고 다시 봐도 길이 없는
청람색 내 나이 마흔 그 시절



*홍윤숙 시집, 그 소식, 서정시학








공허(空虛) - 홍윤숙



하루 해가
이렇게 짧은 것을
미처 몰랐다
여기 저기 상한 몸
다스리는 마음도 그만 지쳤다
꿈이란 말 염치없어 저만치 미뤄 놓고
희망이랑 말도 버거워 내려놓고
오직 작은 바람 하나
풀꽃처럼 소소히 심어 놓고
마른 샘물 한 모금씩 모아 주지만
그것도 미련이라 탓하면 버릴 수도 있는데
날마다 대형 유리창 하나 가득
넘실대는 허허로운 공허(空虛)
이별하고 돌아서는 해질녘 거리
무너지는 가슴, 등
까닭 모를 눈물 속으로 흐르는
알 수 없는 지상의 남은 나날
내 가는 길 어느새 저만치
묘비목(墓碑木) 서 있는 고개,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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