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풍경 - 장만호
늦은 밤, 숨죽인 화계사를 건너다 보면
국립재활원의 아이들
서서히 일어나 하나, 둘 셋 손을 잡는다
휠체어를 타거나 지체 부자유한 별들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긋듯
밀거나 당겨주며 수유리의 밤을 온몸의 운동으로
순례한다. 길 밖에 고인 어둠만을 골라 딛으면서
몸이 곧 상처가 되는 삶들을 감행하며
흔들리는 평생(平生)을, 과장도 엄살도 없이 흔들며 간다
그 모습 가축들처럼 쓸쓸해
왜 연약한 짐승들만 겨울잠을 자지 않는지
작은곰자리에서 내려올 눈발을 헤치며,
왜 사람만이 겨울에 크는지,
묻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붕어빵을 입에 물고는
풍경(風磬)처럼 흔들리며 간다
깨어 있으려고
흔들려 깨어 있으려고
*시집, 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
수유리(水踰里)에서 - 장만호
함부로 살았다 탕진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달 열흘
한 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 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르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채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진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 장만호 시인은 1970년 전북 무주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무서운 속도>가 유일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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