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 - 문신

마루안 2022. 9. 1. 21:31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 - 문신

 

 

나는 지금 앵두나무 아래 서 있다 봄날처럼 앵두나무는 무성한데 앵두는 없고 글썽하게 앵두를 훑던 바람만 갈팡질팡이다

 

지금 앵두나무를 지탱하는 건 자기 뿌리를 향해 무너지는 앵두의 그림자들, 그림자들을 밟고 가는 맨발들, 맨발들 위로 다시 솟아난 종아리들, 끝이 뾰족한 풀잎들

 

누군가 밤새 파헤치다 만 앵두나무 뿌리를 들썩이며 나는 앵두를 물들이던 붉은 저녁에 대해 생각한다

 

대배우 마릴린 먼로 말고는 떠올릴 사람이 없다

 

오로지 붉은,

생각만으로도 출출하게 흘러내리는 봄날

더는 머물 수 없어

 

나는 어제 떠나지 못한 사람처럼 앵두나무 그늘에 서 있다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걷는사람

 

 

 

 

 

 

호젓한 구월 - 문신

 

 

석양의 호숫길을 걷는 동안 나는 무대에 오른 광대의 기분으로 웃었다

 

울었다

길도 외줄이었다

 

누군가 매일 떨어뜨리고 가는 생명처럼 붉었다가 어두워지는 하루를 보내는 일이

 

그림자 같아서

그림자놀이를 하듯

 

자전거를 끌고 가는 아이들 뒤를 밟으며 밟히며 풀기 없이 시들어 가는 잔풀들을 뚝뚝 분질러 보았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이 매일매일 혈육을 여의는 슬픔을 집행하는 형벌이라고

신은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런 일쯤은

저절로 알게 되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저녁처럼 석양은 호수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구월

산과 산 사이에 갇힌 호수의 둘레를 혼자 걸으면

 

보이는 것이 있었다

호숫길을 다 돌고 돌아가는 사람의 등짝에 고여 있는 어둠 같은 거

근심보다는 무심 같은 거

 

무대 뒤로 사라지는 광대의 웃음 없는 웃음 같은 거

 

여전히 내 삶은 팔월처럼 뜨거웠지만, 먼 호숫길을 돌아온 구월 저녁

시에 얹히는 언어의 관절이 우두둑거렸다

 

 

 

 

# 문신 시인은 전남 여수 출생으로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물가죽 북>, < 곁을 주는 일>, <죄를 짓고 싶은 저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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