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말매미 새집에 들다 - 이윤승

말매미 새집에 들다 - 이윤승 지친 노구를 끌고 와 꽃밭에서 생을 마감한 말매미 한 마리 풍장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세 들어 살던 감나무 집 아래 풀씨들 찾아와 흰 꽃으로 장식한 아담한 관 속 나무에 붙어 있는 자세로 엎드린 채 누워 있다 평생 걸쳤던 낡은 육신을 벗어던진 후 몇 번의 비가 더 내리고 햇살들 앞다투어 찾아들면 낡은 몸뚱이는 왔던 곳으로 서서히 스며들 것이다 생전에 얼마나 웃고 울었는지 지상에서 보낸 짧은 삶은 따뜻했는지 물끄러미 바스러진 날개를 내려다본다 위로를 전할 상주 없는 관을 내려다보며 짧고 뜨거웠던 노래를 떠올리며 등짝을 덮은, 한때 빛나고 환했을 날개를 생각하며 우주의 세입자가 떠난 감나무 빈방 창가를 한참 동안 바라다보았다 골목을 지나온 바람이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시집/..

한줄 詩 2022.09.15

불면의 꿈길 - 김석일

불면의 꿈길 - 김석일 불면의 공백은 늘 사각의 틀을 하고 하얀 색으로 나타난다 생전 부모님 모습이 사각 틀 안에 나타나고 유년의 놀이동산도 청춘의 일그러진 모습도 훗날의 먼 길 떠나는 등 굽은 나의 뒷모습도 액자 안의 사진 같은 형상이다 생인손 같던 사랑과 미움의 모습들이 하얀 화선지 위에 먹물 번지듯 시시각각 온갖 모습으로 다가오듯 스쳐지나간다 슬픔도 기쁨도 아닌 눈물이 나고, 사각 틀 밖의 세상으로 가고 싶은데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누군가를 소리쳐 불러보았건만 대답은커녕 뒤도 돌아보질 않는다 결국, 이 밤도 어젯밤같이 허우적대며 망각의 계단을 또 한 칸 올라간다 *시집/ 울컥하다는 말/ 북인 자고 싶다 - 김석일 설령 깨어나지 못한다 해도 보초 서다 고꾸라져 잠들었던 그런 단잠을, 단잠을 자고 싶..

한줄 詩 2022.09.14

좋은 게 좋은 거라서 - 이명선

좋은 게 좋은 거라서 - 이명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것을 찾아다닌다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별거 아닌 일에 별개의 일이 되기도 하여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구실이 될 것 같고 내게 휘둘리다 보면 나는 잡혀 온 방향으로 흘러 거울은 표정이 없고 더 살필 것이 없어 초조해지고 오늘의 내가 빛 좋은 개살구처럼 빚 받으러 온 손님처럼 어림없을 것 같다가 좋은 게 좋은 거라서 나도 모르는 나의 죄까지 수긍하게 된다 외탁의 나는 엄마의 허물보다 더 큰 거울을 뒤집어쓰고 있어 우는 것도 자격이 있어야 울 수 있는 세상에서 오늘을 실컷 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다가 넉살 좋게 앉아 정도껏 살자는 말과 부대끼려는 마음 사이를 오가며 내게 척지고 싶지 않아 엄마의 거울을 뒤로 돌려놓았다 *시집/ 다 끝난..

한줄 詩 2022.09.14

계단 학습법 - 김백형

계단 학습법 - 김백형 계단은 계단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자신이 급경사의 다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올라가면 숨차게 기도로 쫓아 들어와 무릎 접고 발바닥으로 나가는 내려가면 다급히 발바닥으로 들어와 무릎 굽혀 기도로 빠져나가는 그것을 그는 단계라고 배우며 살아왔다 자신을 세어 보는 사람에게도 몇 계단씩 뛰어넘는 사람에게도 더덜이 없는 공평을 유지하며 남은 길을 가늠케 하는 단호한 얼굴 올라가는 중인지 내려가는 중인지 들키지 않으려는 듯 눈 하나 깜짝 않는 무표정의 직각 무수한 발자국에 멍들고 귀가 멀어도 이 꽉 물고 흘러가지 않으려 지나온 길 접고 풀며 시간을 변주하고 있다 *시집/ 귤/ 걷는사람 옷핀 - 김백형 ​ 국민학교 입학식 날, 가슴팍 손수건을 물고 파닥거리던 물고기가 있었지 깻잎 같은 누나와 아..

한줄 詩 2022.09.13

만나러 가는 길 - 김초혜

만나러 가는 길 - 김초혜 시인은 세상의 모든 울음을 우는 사람이다 억울하게 누명 쓴 이의 억울함도 울고 병들어 아픈 사람의 아픔도 울고 자식 잃은 에미의 울음도 울고 사별의 아픔을 겪는 이의 그리움도 운다 심지어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죄인의 고통도 운다 시인은 우는 사람이다 울음의 기록이 시다 *시집/ 만나러 가는 길/ 서정시학 행복과 불행 - 김초혜 지난날의 행복은 오늘을 불행하게 하고 지난날의 불행은 오늘을 행복하게 한다 장수의 비극 - 김초혜 이제 내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 오고 있을 것이다 사랑할 힘도 미워할 힘도 모두 삭아서 텅빈 눈으로 하늘만 바라볼 것이다 행복 - 김초혜 아침 해 몸통을 비집고 들어와 내 마음을 간지르네 햇빛 그 귀함에 새삼 취하네

한줄 詩 2022.09.13

감정의 평균 - 이정록

감정의 평균 - 이정록 ​ 부푸는 무지개를 슬그머니 끌어 내리고 뚝 떨어지는 마음의 빙점에는 손난로를 선물할 것 감정의 평균에 중심 추를 매달 것 꽃잎처럼 달아오른 가슴 밑바닥에서 그 어떤 소리도 올라오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쉴 것 불에 달궈진 쇠가 아니라 햇살에 따스해진 툇마루의 온기로 손끝만 내밀 것 일찍 뜬 별 하나에 눈을 맞추고 은하수가 흘러간 쪽으로 고개 들고 걸어갈 것 먼저 이별을 준비할 것 땡감처럼 바닥을 치지 말고 상처 없이 감꽃처럼 내려앉을 것 감꽃 목걸이처럼 감정의 중심에 실을 꿸 것 시나브로 검게 잊혀질 것 *시집/ 그럴 때가 있다/ 창비 구멍 - 이정록 이거 말이여. 물려줘. 파스에 구멍이 났더라고. 한장밖에 안 썼어. 얼른 뗐어. 근데, 왜 닷새나 있다가 오셨어요? 구멍 난 파스 ..

한줄 詩 2022.09.12

태양은 최악이다 - 류흔

태양은 최악이다 - 류흔 태양이 망할 태양이 부욱 내 머리카락에 성냥을 그어댈 때 나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 공중에다 삿대질을 한다 나이도 있고 해서 이제는 처녀와 연애를 못 한다 옛날에는 여럿을 전전했었지 그 시절 참 좋았다 전성기였어 처녀들은 반드시 전전긍긍했을 거야 나는 그녀들의 태양 처녀의 머리카락에 불이 났겠고 그녀들은 빠짐없이 나에게 삿대질을 했지 망할 놈의 새끼!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면 과거의 나 작은 오해가 있었다면 이해 바랄게 용서를 구할게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심지어는 태양에게도 털썩 무릎 꿇을게 과감히 무릎 꿇은 내가 자랑스럽다 태양이, 누구에게나 비추는 태양이지만 지금 나를 비추고 있는 태양이 부욱 찢은 꽃의 배후를 내 머리 위로 던지기 전까지는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

한줄 詩 2022.09.08

이불 - 박상천

이불 - 박상천 ​ ​ 가을을 지나 겨울 그리고 그 겨울이 깊어졌지만 어느 날 문득, 덮고 있는 이불이 여름 거 그대로임을 알았다. ​ 간혹 바뀐 이불의 두께와 무게로, 혹은 달라진 이불의 냄새로 계절이 바뀌었음을 느끼곤 했다.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 그러나 이젠 시퍼런 가을 하늘도,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의미없는 시간의 한 구석 어딘가에 나는 버려져 있을 뿐이다. ​ 의미 없는 시간의 찬바람이 초라한 이불 속을 파고드는 밤, 아, 이불장 속 압축팩엔 그녀가 넣어둔 지난 계절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압축팩 지퍼를 열면 그 계절의 따뜻한 냄새가 부풀어 오르며 되살아 날 수 있을까? *시집/ 그녀를 그리다/ 나무발전소 정리 - 박상천 어쩌면 삶을 정리할 시간이 없..

한줄 詩 2022.09.07

내가 머문 이 자리에 - 박노식

내가 머문 이 자리에 - 박노식 ​ ​ 새순이 올라오기 전에 꽃부터 걱정하는 마음처럼 조바심은 나를 흔든다 ​ 언젠간 오겠지만, 마른 가지를 어루만지며 입김을 불어 넣은 지 세 해가 다 되어도 꽃소식은 없다 ​ 꼭 보겠노라 애를 졸이며 종일 골목길을 배회하던 그 시절의 그리움보다 더 큰 불안이 여기에 있다 ​ 지나가던 이웃이 '너무 정을 주어도 잔병치레가 많고 결과 보기가 어렵다'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지만, ​ 어린 목련 묘목을 심고 해마다 퇴비를 주고 또 하루에도 수십 번 눈길을 주었으니 사람 같으면 질려서 숨이 막히고 괴로웠을 것이다 ​ 내가 머문 이 자리에 게으름을 잔뜩 남기고 타인보다 뒤쳐진 한 계절을 누린다 ​ ​ *시집/ 마음 밖의 풍경/ 달아실 ​ ​ ​ 복사꽃 아래 서면 - 박노식 ​ ​ ..

한줄 詩 2022.09.07

떨어진 면적의 먼지를 털며 - 기혁

떨어진 면적의 먼지를 털며 - 기혁 ​ ​ 생활이 바뀌면 피부가 아프다 ​ 환절기처럼 얇고 긴 겉옷 속에서 타인의 손을 탄 한 시절이 부풀어 오른다 ​ 열이 난다는 건 어딘가 높낮이가 생겼다는 증거 이별은 서로 다른 기후대를 만들고 각자 살아갈 짐승을 불러모은다 꼬리를 치켜세우고 코를 킁킁거리며 ​ 한때는 인적이라 불리던 체온의 이동 경로를 상상하는 짐승 ​ 피부에도 마음이 있을까 무리에서 떨어진 마음은 어떤 야성을 키울까 ​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 기분과 날씨가 먼저 살에 맺힌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을 때마다 ​ 생활의 등고선을 따라 이어지던 울음도 소매를 걷고서 딴청을 피운다 ​ 핏줄과 인연의 가장자리에서 한평생 피부만 문지르던 생식의 지리 ​ 마음은 길을 잃은 적이 없다 ​ 마지막 순간까지 생애의 한 ..

한줄 詩 202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