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초원의 별 - 신경림

마루안 2018. 3. 13. 20:15

 

 

초원의 별 - 신경림
-몽골에서


닥지닥지 하늘에 붙은 별무리에서
낮게 떨어져내려온 저 별에
나 같은 사람 또 하나 살고 있나보다,
평생을 두고 해온 일 문득 부질없어
그 허전함 메우리라 이 먼 나라까지 와서도
이번에는 그것도 부질없어 저녁 한나절을
낮잠으로 보내는 나를 한밤중에 몰래
불러내는 것을 보면.

듬성듬성 초원에 핀 꽃들을 보게 하고
조랑말처럼 초원에서 뒹구는
날렵한 두 처녀 활기찬
웃음소리를 듣게 하는 것을 보면.

외진 장터에서도 후미진 산속에서도
찾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 또 하나
저 별에 살고 있나보다,
모든 걸 버리리라 이 먼 나라까지 와서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나와 밤새
동무가 되어주는 것을 보면.


*시집, 낙타, 창비

 

 

 

 

 

이역(異域) - 신경림


저 굵은 주름투성이 늙은이는 필시 내 이웃이었을 게다.
눈에 웃음을 단 아낙은 내가 한번 안아본 여인인지도 모르고.
햇살 환한 골목은 한철 내가 정들어 살던 곳이 아니었을까.
문 앞 화분의 팬지도 벽타고 올라간 나팔꽃도 낯설지 않아.

조그맣게 엎드려 사는 사람들은 말씨도 몸짓도 엇비슷해.
너무 익숙해서 그들 손에 묻은 흙먼지까지 익숙해서.
어쩌면 나 전생에 눈이 파란 이방인이었는지도 모르지.
다음엔 그들 조랑말로 이 세상에 다시 올는지도 몰라.

너무 익숙해서 그들 눈에 어린 눈물까지 익숙해서, 마지막
내가 정착할 땅에 가서 어울릴 사람들만큼이나 익숙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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