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할아버지 신발 - 배정숙

마루안 2018. 3. 14. 22:52

 

 

할아버지 신발 - 배정숙


끝물 인생이 웅크리고 앉은 요양원 신발장
절룩거리던 노역에 주석으로 단
마지막 반려의 기록이다

어스름 저녁에 장지문을 닫고
허름한 날개 한 쌍
비상의 각도를 조절하여
이제 피안까지의 거리는 몇 마장이나 될지
훠이훠이 날아와 정리한 슬픔의 깊이가
허방 한 줄

언제 다시 그와 포갤 수 있을지
지루한 자유가 형벌이 되는
하루하루가 소태맛이다
자투리 기억 속 황홀한 구속의 날들
목 빼고 바라보는
저 기다림 한 켤레 위를
암갈색 그림자가 덮어쓰기 한다

하루에 한 번씩 들르는 쇠잔한 노을빛이
잠시 신었다 벗어놓은
한 마디 유언
하얀 고무신이 고요하다


*시집, 나머지 시간의 윤곽, 시로여는세상

 

 

 



노인요양원 203호실 - 배정숙


어제도 막차까지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무대 위로 어느새 낯선 어둠이 내렸다
밤새 산문을 드나든 기다림은
어느 고찰 처마 끝에 매달려
밤을 지새웠는지
은빛 버들치
백발만 몇 가닥 쓸어낸다

밑도 끝도 없는 종점이 불안해
식판 가득 꽃밥 옆엔
별별 반찬이 있지만 건드리지 않는다
온전한 당신이었을 때를 추억하는 일이 주범이다
바람 쇳소리로 우는 동짓달 밤
애써 눈 붙이면
하얗게 눈뜨는 별
그 별의 눈물샘에 잠긴
세월이 건져질까 봐
까칠한 불면의 밤에 모로 눕는다
몸 한 마디씩 허물어간다
묵은 안부 한 마디씩 허물어간다

가마솥에 봄날을 데쳐 말리던 새댁들
오늘은 세월이 그들을 데쳐 말린다

 




*시인의 말

사계로 나눈다면 가을 어디쯤
이제야 소박한 밥상 하나 차려 봅니다.

내게 있어서 당신은
비움이며 채움이고
어둠이며 밝음이었습니다.

구속이면서 자유였고
물음이면서 답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저항의 역주행도 서슴지 않았지만
당신으로 인해
삶의 보폭을 조절하기도 했습니다.
얼마만큼 숙성되었나요?
이제 당신에게 詩라는 이름을 지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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