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밑 빠진 독 - 정선희

마루안 2018. 3. 14. 22:38

 

 

밑 빠진 독 - 정선희


어릴 적 나의 꿈은 두꺼비 한 마리 키우는 것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니고
두꺼비 한 마리 키우는 것,
만지면 우둘투둘 미끄덩거리는 두꺼비 한 마리
커다란 독 안에 넣어놓고 먹이를 주는 것
그놈이 자라서 구멍을 메우게 하는 것

아버지, 처음부터 밑 빠진 독이었다
물을 부으면 돈이 줄줄 새어나갔다
아무리 부어도 독은 차오르지 않고
어머니 점점 지쳐갔다

 

삐걱거리는 자전거 뒤에 아모레 화장품 가방을 싣고 집집마다 골목마다 다니던 어머니, 입에서 노래가 끊기고 웃음이 끊기고, 나는 우등상을 타고 밥을 하고 청소를 했지만, 어머니 여우비처럼 웃었다

 

나는 두꺼비를 기다렸다 내 힘으론 어림도 없어 두꺼비에게 희망을 걸었다 털이 없는 얼룩덜룩한 두꺼비 한 마리 키우고 싶었다 그 두꺼비가 자라서 구멍 메워주기를 바랬다 돈을 벌면 벌수록 더 커지는 구멍 자식들이 자랄수록 더 커지는 구멍 두꺼비가 온 몸으로 막아주기를 바랬다

지금도 나는 두꺼비를 기다리고 있다
70이 넘어도 철들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 대신 막아줄 사랑스러운 나의 두꺼비


*시집, 푸른 빛이 걸어왔다, 시와표현

 

 




파란만장 하니? - 정선희


티 하나 없는 얼굴은
너무 심심해
백옥 같은 얼굴은
유리창처럼 미끄러지지

거칠거칠 표면이 좀 투박해야
잘 붙는 마음이 있어
상처 하나 보여주면서
정이 드는 친구가 있어

어떻게 평생을 살면서
상처 하나 안 만들 수 있니?
상처를 비켜간 사람은
온실 속 화초 같은 사람

친구가 팔 걷어붙이고
핏줄 세워
피 터지게 싸울 때에도
저만치 불구경을 하고 있었을 걸

햇볕에 얼굴 탈까봐
팔다리에 흉터 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어떻게
뜨겁게 살 수 있겠니?

사연이 있는 얼굴이 좋아
비바람이 할퀴고 간 자국
주름살을 펴면 두루마리 사연이
좌르륵 펼쳐지는 사람이 좋아

 

 

 

 

# 정선희 시인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2012년 <문학과의식>,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푸른 빛이 걸어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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