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문 - 주영헌

마루안 2018. 3. 23. 21:45



문 - 주영헌



말이 다 빠져나가고
녹슨 대문이 굳게 입을 닫았다


문의 속성은 닫히는 것이다
아무리 힘을 줘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말의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문은 말의 사악함을 안다
서로 기대어 살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자존심 따윈 버리고 탄생했다는 것도


달콤함을 가진 말과
달콤함으로 문을 유혹하는 말
그리고 제자리를 지키려는 문


문의 속성은 열리는 것이다
안쪽으로 문이 열리고
말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말은 문 안의 것들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나를 파괴한다



*시집, 아이의 손톱을 깎아줄 때가 되었다, 문학의전당








끝 - 주영헌



길이 막바지 푸른 잠행으로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 걸음에서 밀려난 길의 끝을 알리는 면식은 수풀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최근의 명부(名簿)에서 누락된 길, 느린 속력의 지점과 맞닿아 있는 길
먼 곳의 나뭇잎들은 팔랑거리며 붉은 한기를 점등하고 있다 더 이상 그 길로 들어설 수 있는 목적지는 없다 길 끝에 몇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길의 끝과 숲의 끝이 같은 일면식으로 만난다는 전언


느릿한 그림자들이 나무를 빙빙 돌아나가고 있다
나무에 묶인 검은 개가 나무를 따라 눕는
마을의 오후가 저 아래 있고
절개된 길의 끝에서 시동을 끄고 어스름의 시간을 서성거린다
지층으로 들어갔다는 듯 솟아 있는 길의 끝엔
온통 햇빛으로 내려앉은 잔디만 누렇다


아슬아슬한 후경의 풍경은 되돌아 나서고 있다
후경 속에서 갓 꺼낸 길은 아직도 구불구불하다
나는 스스로 구부러진 길을 본 적이 없다
구부러진 길에서 보면 모든 길은 구부러져 있기 마련
길을 반듯하게 풀며 후진으로 멀어지는 숲과 길의 끝


끝은 저녁처럼 어두워져 간다
결계가 가득한 길에선 사면이 표류선처럼 경계 신호를 채집하고 있다


저쪽은 먼저 지워진 곳이다





# 곱씹으면서 여러 번 읽게 만드는 시다. 특히 마지막 연의 한 줄로 압축한 싯구가 명료하게 박힌다. 한 글자로 찍은 제목도 명료해서 마음에 든다. 조밀하게 짜인 내용을 이렇게 한 글자의 제목에 모든 걸 내포하고 있다. 시인이 시를 쓰지만 제대로 읽은 놈이 임자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독한 중독 - 조성국  (0) 2018.03.23
안개 풍경 - 유계영  (0) 2018.03.23
사막의 광대뼈 - 박시우  (0) 2018.03.23
사람의 재료 - 이병률  (0) 2018.03.23
이야기꽃, 그 꽃 - 유기택  (0) 2018.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