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야기꽃, 그 꽃 - 유기택

마루안 2018. 3. 23. 18:20

 

 

이야기꽃, 그 꽃 - 유기택


춘분 전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한 사내가
잘못 내린 버스 정거장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고의가 의심되는 사내의 실종 소식은
곧바로 꽃 세상으로 타전되었고
개화 등고선을 한 뼘 끌어올리고 말았습니다

두손매무리한 생활고에 시달리기만 한 한철
어금니 앙다물고 지낸 겨울의 반란입니다

길을 잃어 본다는 건
금지된 것들에 퍼부어보는 열렬한 항변

이젠 한 뼘 더 높은 데서도 꽃이 피겠습니다

춘분 아침 어디선 꽃 혁명이 불고 있겠습니다
모르긴 해도
찬란한 민란이 어딘가에 있기는 있는 겁니다


*시집, 참 먼 말, 북인

 

 




괜찮아 - 유기택


꿈속에서 꿈 이전의 것들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봄 이전의 것들도
안 봄이라 해야 할지 못 봄이라 할지

조금 서운해도 좋겠습니다

시청에서 지정한 현수막걸이에
누가 의뢰한 꿈이 내걸리고 있습니다

지난밤 다녀간 꿈은
이생의 바로 앞선 전생일지 모릅니다

꿈에서는 늘 먼 데를 떠돌다 깹니다
아는 얼굴에 모르겠는 얼굴이 반반

모두 모여 봄이라고 수런거리는 통에
안 봄인지 못 봄인지 그럴 겁니다

강제 철거되지 않는 꿈을 걷기 위해
지정된 월요일 기둥에 시청을 맵니다

조금 서운해 쓸쓸해도 괜찮겠습니다


 

 

# 유기택 시인은 춘천 출생으로 춘천 <시문> 동인이다. 시집으로 <둥근 집>, <긴 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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