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는 동백을 보며 - 박승민

마루안 2018. 3. 22. 23:20

 

 

지는 동백을 보며 - 박승민


내 생(生)의 미등에 빨간불 켜졌다

손톱을 깎아야겠다
수염을 밀어야겠다

얼어붙었던 하늘에 다시 별자리를 잇고
양떼구름을 풀어 염장이를 수소문해야겠다

아직 발이 나지 않은 뿌리에게 싱싱한 단백질을 선물하리라
한때 연적(戀敵)이었던 그대에게 더 이상 사과를 늦추지는 않으리

한세상 살면서
인간이 차려놓은 밥상이란
늘 한두 가지를 빠뜨려서 간이 맞지 않은 것

입맛을 잃듯 길을 잃어버린 생이었다고는 쓰지 않으리
한 계단쯤은 더 내려가서 강물의 마지막 임종을 오래 지켜보리라

그리고
밤이 오면
아무나 붙잡고 용서를 구하리라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그림자의 중심 - 박승민


앞 바지단추를 열고
전봇대에 자기 물그림자를 구불구불 새겨 넣고 있는 저 사내는
왼쪽으로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기울었다가 용케도 다시
오른쪽으로 천천히 천천히 올라온다.

전봇대가 그의 혈육이나 되는 듯
한번 느리게 올려다 본 후
쫙, 째려본 후
씩, 웃으면서
톡톡 등을 두드려준다.

비틀비틀
비틀비틀

전봇대의 그림자 중심으로부터 차츰 멀어지는 언덕쯤에서
사내는 점점 왼쪽으로 왼쪽으로 다시 기울어지더니

기울어지더니 그만 땅에 오리나무 나뭇잎처럼 납작하게 붙어버린다.

 

 

 

 

# 박승민 시인은 1964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숭실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가 있다. 박영근작품상, 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의 재료 - 이병률  (0) 2018.03.23
이야기꽃, 그 꽃 - 유기택  (0) 2018.03.23
각성제 - 이문재  (0) 2018.03.22
내가 살을 빼야하는 이유 - 윤제림  (0) 2018.03.22
모진 꿈 - 임성용  (0) 2018.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