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독한 중독 - 조성국

마루안 2018. 3. 23. 22:52



지독한 중독 - 조성국



귀밑머리 새하얗도록 그렇게

마음까지 부렸던 유리공장 그만두고부터

알았다 재단하고 남은 자투리를

파유리 통에 깨던 소음 속에서 밥을 먹고

밤낮없이 고속으로 돌아가는

복층유리 생산 기계 굉음 속에서 연애하고

잠자고 아이 낳고 늙어가며 병도 들고

희로하고 애락하던 공장의 굉음을

견디는 것이 외려 쉽다는 것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깨진 유리날에

팔목 인대가 몇 번씩 끊어지고

의수한 손가락마저 싹둑 잘리더라도

저 공장의 소음이 아니면

굉음이 아니면 허물없이 저무는 하루하루도

고역인 것을 짐작조차 못했다



*시집, 슬그머니, 실천문학사








어떤 각오 - 조성국



필리핀 아비와 베트남 어미가

출생신고도 못한 다섯 살배기

사내아이와 목하 산수 공부 중이다

옹색한 살림방 쪽창 너머

야근 재촉하는 어스름은 깔리는데

먼지 낀 거미줄 너풀거리는 백열등 아래서

일곱 더하기 셋은? 답을 묻는 순간

갸우뚱 고갤 흔드는 아이의 머릴 쥐어박으며

필리핀 아비가 두 손을 쫘악 폈다

알아먹기 쉽게 천천히 손가락을 꼽아도

일곱밖에 셀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베트남 어미의 손가락에도 자꾸만 힘이 가고

발가락까지 내밀어 열을 채우는 제 아빌 곰곰이 보며

혀 짧은 코시안말로 다음부텀 내 것으로 하자고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바짝 내밀 적에

낡은 안전화 끈 질끈 조여 매고

수은등 환한 작업장 내딛던 어미는

연일 철야라도 시키면 하겠다고 이를 악물고

아비는 불법체류자로 신고당하더라도

이번 달엔 체불 임금을

꼭 받아야겠다고 맘먹었다






# 조성국 시인은 1963년 광주 염주부락에서 태어났다. 1990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슬그머니>, <붉은 진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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