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고양이 - 박숙경

마루안 2022. 2. 18. 22:39

 

 

길고양이 - 박숙경


어둠을 사랑한다는 말과 도둑이라는 누명의 말은
왠지 은밀히, 라는 말과 잘 어울리죠

눈물을 사랑해요

심심한 날이면 자음 모음을 허공에 던져 흩어진 낱말을 낚기도 해요 처녀자리에 영역 표시를 하는 건 우리들만은 아니죠 슬퍼질 때는 잘게 다져진 별빛으로 심장 한복판에 눈물의 뼈대를 그려요

 

본능은 잔인하기도 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할 것은 기억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유죄라는 붉은 글씨를 가슴에 새기죠

 

벽과 벽 사이를 사랑해요

그림자들의 수군거림을 엿듣거나 바람의 목격담이 들려오면 우울해져 헛기침이 나요 아무렇게나 흘려놓은 몇 마디와 팽팽해진 밤의 감정이 손을 잡으면 어둠으로 깊어져 눈빛이 흐려져요

안개 같은 사랑을 꿈꿔왔어요
안개는 안개를 외면하지 않아요
나지막이 안개가 번져오면 젖은 안개를 따라가요
떠돌던 바람을 안고 꿈속의 그 풀밭을 달려요
모든 것이 안개 탓이라고 외치면 기적이 솟아날까요

한 방울 눈물 없이도 슬피 울던 비둘기 어딘가로 떠나고

남겨진 목소리만 구구구

빈 벤치 앞을 기웃거려요

술렁이던 허공에 신생의 별 하나 돋아날 때까지
떠날 수 없는 이 거리를 사랑해요
어둠을 사랑해요
절망, 그다음을 사랑해요

 

*시집/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문학의전당

 

 

 

 

 

 

고등어- 박숙경


흑청색의 타투가 새겨진 오른쪽 어깨가 물결무늬로 출렁거리면
달빛은 지느러미를 통과한다

​한때 빛났던 흔적들

차라리 그리워했다고 말할 걸 그랬다

눈물이 눈시울까지 당도하는 것보다 빙하기가 빨랐다

뜬눈으로도 볼 수 없는 세상
낭만과 달빛을 버리니
꿈이 한층 가벼워졌다

헷갈리는 기적과 애매한 운명 따위를 믿지 않기로 하면
이런, 자꾸 쏟아지는 졸음을 어쩌나

뭍이 가까워질수록 기도의 시간이 줄었다

그의 눈물처럼 오래된 사랑처럼
이별은 늘 뜻하지 않게 와 있었다

 

 

 

 

# 박숙경 시인은 경북 군위 출생으로 2015년 <동리목월>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날아라 캥거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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