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문득 조금 억울한 인생 - 류근

마루안 2018. 3. 29. 21:26



문득 조금 억울한 인생 - 류근



출근길이 꼼짝도 않는다
지렁이 보폭보다 짧게 주춤주춤 엎질러지다 보면
저만치서 무슨 바구니 같은 데 올라타서
가로수 전지 작업하는 구청 용역 인부들
아침부터 길을 막고 저 지랄이냐, 하다 말고
가만 생각해보니 나보다 나무가 상전이다
출근도 명퇴도 없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죽는 날까지 사람들 용역으로 부리며
세금으로 몸치장하는 상전들
국회의원 같은 자세로 일없이 서서
흙과 빗물과 햇빛과 바람까지 소집해
보좌관 거느리듯 앵벌이로 내세우는
하느님 마름 같은 불한당 놈들
저놈들 먹여 살리자고 나는 아침부터
길 위에 꼼짝도 못 하고 선 채 결국
나무 대신 사방팔방 삿대질이나 하고 이 지랄인가
근로소득세, 주민세, 고용보험료 벌러 가지 못해
쓰지도 못할 발암물질이나 푸들푸들 푸르르르
엽록소처럼 합성해내고 있단 말인가



*류근 시집,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








세월 저편 - 류근



(추억의 배후는 고단한 것 흘러간 안개도 불러 모으면 다시 상처가 된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바라보는 것)


바람은 아무거나 흔들고 지나간다
여름 건너 하루해가 저물기 전에
염소 떼 몰고 오는 하루 뒤로 희미한 낮달
소금 장수 맴돌다 가는 냇물 곁에서
오지 않는 미래의 정거장들을
그리워하였다
얼마나 먼 길을 길 끝에 부려두고
바람은 다시 신작로 끝으로 달려가는 것인지
만삭의 하늘이 능선 끝에
제 내부의 붉은 어둠을 쏟아내는 시간까지
나 한 번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그 먼 강의 배후까지를 의심하였다
의심할 때마다 계절이 바뀌어 그 이듬의 나뭇가지
젖은 손끝에 별들이 저무는 지평까지 나는 자라고
풍찬노숙의 세월을 따라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어디까지 흘러가면 아버지 없이 눈부신 저 무화과나무의 나라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흘러가면 내가 아버지를 낳아 종려나무 끝까지 키울 수 있을까)


세상에 남겨진 내가 너무 무거웠으므로
때로 불붙는 집 쪽에서 걸어 나오는
붉은 짐승의 꿈을 신열처럼 따라가고


오랜
불륜과도 같은 세월 뒤로 손금이 자랐다
아주 못 쓰게 된 헝겊 조각처럼
사소한 상처 하나 가릴 것 없는 세월이
단층도 없이 흘러가 쌓였다
이쯤에서 그걸 바라본다
황혼 건너 저 장대비 나날의 세월 저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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