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소낙비 젖는 날 - 이창숙

마루안 2018. 3. 29. 21:13



소낙비 젖는 날 - 이창숙



살아 있음의 증거입니까 날아갈 듯이
가볍게 무덤 위에 무덤이
무덤 옆에 어머니의 오그라든 젖무덤이
아직도 식지 않았는데
우산을 펴 잠든 어머니의 가슴을 덮는다
반쯤 식었을 가슴 한 켠에 어느
풀꽃의 싹이 눈을 뜨고 있을까
이 비, 무덤마을에 황토빛 울음
흐르게 한다


누군가 영혼의 방을 들고 이곳으로 오르고 있다
흔들리는 세상을 지나
외길에서만 웃는 부활의 봉오리
생겨나기 시작하는 곳
날마다 하나둘씩 죽음의 인연들이 악수한다
바람도 낯설지 않는 이 땅 여기 저기
흙뿌리에 수족 다 녹아내리는 소리
젖은 무덤은
무겁고 평화롭다.



*시집, 그대 안에 길을 내어, 마을








봄이라구요 - 이창숙



지난 밤 잠꽃에 깨어날 줄 몰라
이 아침 미열로 들뜨네
수척한 얼굴로 내 오라비
봄강을 건너오라고 바람 실어 보내네
저 순결한 햇볕 좀 봐
나무들은 제키의 높이만큼
찰랑이는 꿈의 잎새를 둥글게 귀 세우며
밀어올리고 있네
이제 사각거리는 것들
겨울시첩에 묻어두고
서럽던 어두움 모두 불질러버릴 거야
그러면 안개세상에 흩어 놓은
내 숨진 말들
오롯이 다발로 봄꽃 피우겠지.





# 시인의 말

내 잠 속까지 따라와 누운 무겁고 슬픈 것들에게
오늘도 감사한다. 살갗 아프게 튀어오르던 핏줄도
두려움 없이 달콤한 평안을 얻고, 이제
동강난 사랑의 말에 속박당하지 않아도 될 내 얼굴을
거울 속 저편으로 비스듬히 지워가고 있다.
그리고 어둑어둑 불빛 보이는 따뜻한 내 '詩의집'을 향해
혼자 떠나야 한다.


이탈하지 못한 일상의 관념들로 그려진 내 삶의 묶음들이다.
내 안의 나를 찾는 돋보기 속에서 불어대는 바람은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마음짓 서툰 시편들마다 부끄러움 뿐이다
이 가을 안 아프고 싶다
羅城에 사는 내 오라버니 이풍호(李豊鎬) 시인께
첫시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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