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둠 휘늘어진 곳에서 보내다 - 천수호

마루안 2018. 3. 31. 21:59

 


어둠 휘늘어진 곳에서 보내다 - 천수호


가로등 하나, 시골 밤의 바지랑대다

폭싹 꼬꾸라질 듯 삭은 밤이
불빛 하나에 온몸 지탱하고 있다

저렇게 매달리기만 하면
이쪽 끝에 치렁치렁 닿은 어둠의 가랑이
다 젖고 말 텐데

그래도 바지랑대는 저렇게
어둠이 휘늘어진 곳에 받치는 것

당신 보내고 바라보는 가로등 하나
시골 밤의 바지랑대다

내 가랑이 다 젖도록 바라본다
저쪽 끝에서 다시 팽팽히 당기는 당신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민음사

 

 




감물 - 천수호


감물이라는
잘 지워지지 않는 지명이 있다

슬쩍 스친 지명이지만
가슴엔 한 점 얼룩이 돋아
도톨하게 만져진다

떫은, 목메는 감물 흔적이다

일찍 떠난 내 큰언니의 초경 자국,
한 방울 남짓 떨구고 간
그 댕기 머리 뒷모습을
나 또한 엄마처럼 못다 배웅했는지
삼십 년 넘도록 지우지 못한다 

방금
내 몸을 스쳐 간 지명이여
언니라는 혈흔의 감물, 나풀거리는
저 생생한
댕기, 댕기 물감




*自序

폐교 운동장 구석,
서녘 하늘로 기운 태양에 아직 달아 있는 몽돌 하나
어디에서 와서 그 어색한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홀로 품으려 애쓰는 자리, 혼자 바다를 그리워하는 자리

내게 시는 연민에서 출발한 사물 이해법
그것이 사물을 보게 한, 또는 보이게 한 시력이다
내 시 속에 늘 오도카니 있는 존재들,
그 외딴 것들이 느끼는
아주 붉은 현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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