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꽃 속으로 추락하다 - 홍성식

꽃 속으로 추락하다 - 홍성식 일없이 서둘러지는 발걸음 아래 아름다웠던 전설은 파지처럼 밟히고 사람들 휑한 가슴마다 쓸쓸한 썰물 눈이 부신 한낮의 아스팔트 위 꽃잎들 비명으로 흩어진다 겸허함을 거세당한 상승의 욕망 한 번 올라간 건물은 다시 고개 숙일 줄 모른다 층층이 블라인드 쳐진 그곳에선 우리와 등돌린 비밀스런 거래가 밤낮 없이 행해지고 먼지바람의 철거민촌 아이들은 더 이상 꽃잎의 은유가 아니다 꽃의 시대가 목말랐던 그들 맨발로 겨울산을 헤매 다녀도 무더기로 피어있을 진홍빛 희망을 잃지 않은 가슴은 눈보라 채찍 앞에서 꺾인 무릎 다시 세웠다 이제는 떠도는 이야기로만 남았지만 올해도 그 산에선 사람보다 필경 꽃이 먼저 올 것이다 이제 봄이면 도로마다, 광장마다 꽃잎들 함성으로 난분분(亂粉粉)할 텐데 살..

한줄 詩 2018.04.28

복사꽃 징검다리 - 박경희

복사꽃 징검다리 - 박경희 흔들바람에 안테나 돌아갔어도 지붕 위로 올라갈 늙은 사내 없는 집 지나는 우체부 불러 세워, 안테나 수도 계량기 보게 하는 일 눈 침침해져가는 할매 그 참에 전기선도 놓치는 일 없다 다닥다닥 붙은 시금치 캐 차곡차곡 봉다리에 넣고 가져다가 안사람 주라며 복사꽃 눈으로 본다 발 디디는 곳마다 징검다리, 돌절구 위 녹슨 솥뚜껑 그림자 말라간다 아이들 소리 저문 지 여러 해, 감나무와 늙어가는 그늘만 구시렁거린다 그래도 필 건 피고 질 건 진다고 한 번 호미질에 뻐꾸기 울고 한 번 쟁기질에 복사꽃 진다 철 따라 농사져 겨우내 병원비로, 유모차 끌고 신작로 가다가 차에 치여 제소리 못 하고 황천길 간 앞집 성님 생각에 염소 고삐 잡아채며 메에, 운다 까막까막 졸린 눈 비비며 들창 너머..

한줄 詩 2018.04.27

목 없는 나날 - 허은실

목 없는 나날 - 허은실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고 부서지는 동상(銅像)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스러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 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시집, 나는 잠깐..

한줄 詩 2018.04.26

일방통행로에서 보는 신호등 - 김해동

일방통행로에서 보는 신호등 - 김해동 개망초 핀 언덕길을 지나 일방통행로에 들어섰다 노을에 젖은 신호를 받는 황망한 시간 20년 가까이 남의 부채를 떠안고 더러는 산에도 가고 때로는 새벽녘 학교 운동장을 수십 바퀴씩 돌면서 그래도 '잊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희미한 나무들은 그대로 숲이 되었다 기다린다는 어리석은 기대가 얼마나 치명적인 댓가를 치루게 하는지 전혀 무관하게 슬쩍 끼어드는 차량도 눈 감아 주어야 했다 들풀처럼 한자리에 나서 서로가 전부였던 우리 상처가 무엇인지 배반이 무엇인지 그저 삶이 상처라며 일방적으로 바라보며 살아 온 사람 한 번 잘 못 들면 때와 장소도 없이 체증에 시달리게 한다 일방통행로에서 보는 신호등처럼 *시집, 비새, 종문화사 터널 - 김해동 하루를 살면서도 터널 몇 개씩 지난..

한줄 詩 2018.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