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 오는 날, 희망을 탓했다 - 황학주

마루안 2018. 4. 26. 19:16



비 오는 날, 희망을 탓했다 - 황학주



비바람에 벚꽃 질 때 어디에서 어디로 가든
이름을 알 수 없는 죄스러운 희망이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걸레를 밀며
비가 들이친 마루를 닦으며


희망에겐 절망이라는 유일한 선생이
있는 듯도 하여
먼 훗날 벚나무 교정을 떠나 살 때도
벌로 청소를 시키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곤 할까 생각했다


교실에 남은 나를 잊어버리고 비가 내리던
하루,라는 말이 가장자리 없이 춥던 날
용서를 청하지만 용서받을 사람은 없고
모든 것을 놔둔 채 나만 탓할 수도 없는


매 순간 좀체 밝아지지 않는 그런 희망 속에
매 순간 좀체 어두워지지 않는 그런 희망이 있었다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창비








족발 먹는 외로운 저녁 - 황학주



족발집 노을이란
모항 귀퉁이 족발집에서 보는 고운 노을을 말하는데
어느날 실연한 노인이 뒷걸음으로 모항에 돌아와 선창에 앉으면
각을 뜬 꼬들꼬들한 발들은
접시 위에서 귀띔해준다
​더 갈 수 없을 때
노을은 바다 앞에 필 수 있다
그 노을이란 피할 수 없는 어떤 걸음
혹은 희생이라는 것, 바다에 발을 올려놓은
가장 예쁜 노을은
시궁창 속으로 가장 자주 지나간 부위라는 것​
인간의 사랑 같은 것도
갈라지고 터진 발가락 같은 곳에 화두를 던진 채 캄캄한 길을 통과한다고
돼지우리에서 늘 멀미를 하며 걸었지만
나는 할 일은 다했고
어쩌면 당신을 닮은 것도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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