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살 - 이강산

마루안 2018. 4. 27. 22:26



살 - 이강산



정선 강원여인숙 공중화장실에서 마주친 벌레가 내 신발 감춰둔 9호실 문지방을 넘어설 때까지
내가 집을 떠나 세 끼 밥 먹고 덜덜 떨며 9호실에 잠긴 것처럼 그도 1박 2일 시린 손으로 문고리 닫아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세월이 대수랴
떠도는 놈끼리 살 부비면 그만일 것을


구절리역 앞 대성집 간판의, 비둘기호 막차 몰래 발라낸 생선뼈의, 엄지발가락에 고드름 매달아놓은 구절리여인숙의
살 못 잊어
구절이에 와선
살 한 점 못 대고 가는 길,


나를 유혹한 광부 문 씨의, 똥골 사택을 뛰쳐나와 영영 놓쳐버린 첫 남자의, 무사한 나를 향해 껄껄대던 동원탄좌 늙은 광부들의
살 잊힐까
사북에 와선
시꺼먼 눈발에 젖어 돌아가는 길,


내 생의 열대여섯 해란 너무 짧은 세월이었구나, 싶다


그리운 살들이 폐광처럼 묻혀가는
쉰넷의 정초,


강원여인숙 벌레 한 마리라도 좋구나, 싶다



*이강산 시집, 모항, 실천문학사








젓가락 - 이강산



남산골 황태탕 밥상이 넓고 길다


하룻밤 묵겠다고 작정한 순천 사람은 밥상 대각선, 내 앞의 묵사발까지 젓가락질을 한다
팔이 짧아 그예 접힌 무릎을 펴고야 만다


아하, 바라보자니 젓가락도 엉덩이 들고 무릎뼈까지 펴는 것이다


오늘밤 젓가락이 왕복한 대각선이란 순천에서 서울을 터
풍찬 노숙으로 서너 번쯤 척추가 접혔을 터


저 늙은 육신이 짐승이며 풀이며 매운 놈 뜨거운 놈 껴안고 내치는 것이니
아예 무릎 펴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무릎 꺾이면 마지막인 줄 꿰뚫고 있는지 모른다






# 시인만의 개성이 느껴지는 독특한 문체와 호흡이 인상적이다. 다방면의 예술에 조예가 깊은 예술지상주의자의 시적 내공이 느껴진다. 단박에 감지되는 맛이 아닌 두어 번 씹어야 서서히 단물이 나오는 시여서 여러 번 읽게 된다. 주목할 만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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