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복사꽃 징검다리 - 박경희

마루안 2018. 4. 27. 21:39

 

 

복사꽃 징검다리 - 박경희


흔들바람에 안테나 돌아갔어도 지붕 위로 올라갈 늙은 사내 없는 집
지나는 우체부 불러 세워, 안테나 수도 계량기 보게 하는 일
눈 침침해져가는 할매 그 참에 전기선도 놓치는 일 없다

다닥다닥 붙은 시금치 캐 차곡차곡 봉다리에 넣고
가져다가 안사람 주라며 복사꽃 눈으로 본다
발 디디는 곳마다 징검다리, 돌절구 위 녹슨 솥뚜껑 그림자 말라간다

아이들 소리 저문 지 여러 해, 감나무와 늙어가는 그늘만 구시렁거린다
그래도 필 건 피고 질 건 진다고
한 번 호미질에 뻐꾸기 울고 한 번 쟁기질에 복사꽃 진다

철 따라 농사져 겨우내 병원비로, 유모차 끌고 신작로 가다가 차에 치여
제소리 못 하고 황천길 간 앞집 성님 생각에 염소 고삐 잡아채며 메에, 운다
까막까막 졸린 눈 비비며 들창 너머 복사꽃 진다


*시집, 벚꽃 문신, 실천문학사

 

 

 

 

 

 

상강(霜降) - 박경희


낼모레면 칠십 넘어 벼랑길인디
무슨 운전면허여 읍내 가는디 허가증이 필요헌가
당최 하지 말어 저승 코앞에 두고 빨리 가고 싶은감?
어째 할멈은 다른 할매들 안 하는 짓을 하고 그랴
워디 읍내에 서방 둔 것도 아니고 왜 말년에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여


오 개월 걸려 딴 운전면허증에
한 해 농사 품삯으로 산 중고차 끌고 읍내 나갔던 할매
후진하다 또랑에 빠진 차 붙들고
오매, 오매 소리에 초상 치르는 줄 알고 달려왔던 할배
그리 말 안 듣더니 일낼 줄 알았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풀린 다리 주저앉히고 다행이여, 다행이여
혼잣말에 까딱까딱 해 꺼진다

 

 

 

# 박경희 시인은 1974년 충남 보령 출생으로 한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벚꽃 문신>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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