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호한 것들 - 정병근

마루안 2018. 5. 7. 21:07



단호한 것들 - 정병근



나무는 서 있는 한 모습으로
나의 눈을 푸르게 길들이고
물은 흐르는 한 천성으로
내 귀를 바다에까지 열어 놓는다


발에 밟히면서 잘 움직거리지 않는 돌들
간혹,천길 낭떠러지로 내 걸음을 막는다
부디 거스르지 마라, 하찮은 맹세에도
입술 베이는 풀의 결기는 있다


보지 않아도 아무 산 그 어디엔
원추리꽃 활짝 피어서
지금쯤 한 비바람 맞으며
단호하게 지고 있을 걸


서 있는 것들, 흔들리는 것들, 잘 움직거리지 않는 것들,
환하게 피고 지는 것들
추호의 망설임도 한점 미련도 없이
제갈길 가는 것들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들



*시집,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 천년의시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 정병근



나의 前生은 일찍이 끝이 났다
반란의 불길을 가까스로 피해
결사 항전의 칼을 갈 때
힘이 다한 몸의 장렬한 玉碎(옥쇄)를 결심할 때
푸른 불똥을 가진 짐승의 시간이
한 순간 내 목숨을 앗아갔다
나는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나는 한 때 나를 옹호하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너를 물어뜯은 적이 있다
너의 살을 뚝뚝 씹으며 포효한 적이 있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피의 날들
주체할 수 없는 증오 때문에 너를 숙청한 적이 있다
너를 제거하기 위해 가장 은밀한 시간의 틈새로
자객을 보낸 적이 있다
나는 알 수 없는 분노로 책을 불태우고
사람의 목을 댕강댕강 날린 적이 있다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르고 하늘이 갈기갈기 찢기며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었다 무서운 줄도 모르고
붉은 노을이 간지러워 옆구리를 득득 긁다가
피묻은 칼을 후두둑 던진 적이 있다
반성도 없이, 나는 갈 때까지 가다가
내 손으로 내 눈을 찌르고 내가 내 무덤을 파서
오래 전에 비침하게 죽은 적이 있다
너에게 처형당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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