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못, 두들겨라 연못 - 서규정

마루안 2018. 6. 12. 21:03

 

 

못, 두들겨라 연못 - 서규정


후드득후두득 지나가다 괜히 굵어지는 비
경기장에만 가면 먹구름은 왜 몸부림치듯 몰려다니는지
갑자기 생각나요, 시골구석을 온통 미모로 사로잡다
서울로 대학 가, 가짜 고시생과 살림 차렸다 들켜선
아이는 외국으로 입양시키고
첩첩산중에 들어가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는, 해인스님
어두컴컴한 토굴 속에서 오늘도 무얼 용맹정진 하시나요
백년이 흘러도 상처 하나 없이 미끈한 것은, 시간과 바람뿐인 것을
환호작약, 여기를 좀 보세요
이 삼만 운집한 관중 앞에서 투수가 백 개 이상 던진 공보다
하나, 이번에 던질 공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데
높이 든 관중들 손목마다가 구장에 꽂힌 너덜너덜한 꽃다발이라면
통 목숨, 발끝에서 머리까지가 온통 목 줄기인 해바라기처럼

비는, 이 세상에 처음 박힌 못이 아닐까요
물에 떨어진 빗방울이 동그랗게 그려가는 파문
못대가리도 활짝 펴지면 저렇게 아름다워요
우리 못처럼 모여 연못에서 같이 살아요, 스님
비는 비린내를 풀풀 풍기고, 연꽃은 뜬구름의 기억을 살살 더듬듯


*시집, 다다, 산지니

 

 

 

 



나비 잡는 법 - 서규정


팔랑팔랑 나는 저 책
세상을 새롭게 열어버릴 듯이 날던 책장이
눈에 어른어른
우리 동네에 처음 들어왔던 앳된 소녀만 같아서
읽기도 어렵고 덮기는 더 싫어, 영
공무원 시험을 볼 때마다 낙방을 하고
떨어지려야 더 떨어질 데가 없는 바닥을 전전하며 살게 해준
그 얇디얇은 날개가
바람이면 바람 속에서 어떻게 흩날리고 있을까
나비야 나비
고맙다, 높이보다 바닥이라는 넓이를 살게 해준 그 공책을
하얀 나비라 부르는,

이 박차 막바지의 생, 내 최고의 직장은 공공근로였다만

다시 나비를 잡으려면 몰래몰래 다가가
집게손가락에 날개 끝이 닿을락 말락 하면
고개를 돌리고 입을 크게 벌려 하품 한 번 하고
사르르 눈을 감아 버릴 것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한국해양문학상, 부산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자꽃 피는 길 - 김점용  (0) 2018.06.12
백일홍, 헐벗으며 피는 꽃 - 배정숙  (0) 2018.06.12
탑골공원 - 박승민  (0) 2018.06.12
처음 - 하린  (0) 2018.06.12
늙은 호박의 학명을 묻는다면 - 심은섭  (0) 2018.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