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빈 발바닥 - 유병근

마루안 2018. 6. 12. 21:34



빈 발바닥 - 유병근



길이 걸어온다

흙먼지가 된 발바닥이

아직도 저만치서 걸어온다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세상 바퀴소리에 귀를 닫으며

멀리 길을 돌아서 걸어온다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길에서 길을 만나고

길에서 길을 버리고

두서없는 시간이 걸어온다

걸어오다가 지리멸렬한

길의 어떤 가닥은 대충

발바닥에서 떨려 나가고

빈 발바닥 혼자

옛이야기 틈새로 걸어온다



*시집, 통영 벅수, 작가마을








열세 시간 - 유병근



지루하다고 조금 쉬었다

열세 시간의 질긴 산행을 따라

안개비는 이따금 앞장을 섰다

열세 아이의 이상(李箱)과

안개비처럼 유령처럼 떠도는 열세 시간

눈치코치도 없는 안개비

발자국 소리를 그냥 따라왔다

바람이 이따금 알리바이를 지웠다

숨 쉬는 산의 소리를 찾는

물통은 조금씩 갈증을 풀었다

퍼질러 앉은 풀밭에 등을 기대었다

초콜렛 하나 천천히 먹었다

얼굴을 적시는 안개비를 먹었다

이상의 열세 아이가 다시 보였다

열세 시간아 따라 붙으며

뒤처진 내 등을 자꾸 떠밀었다







# 유병근 시인은 1932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沿岸集>, <遺作展>, <西神캠프>, <지난 겨울>, <사일구 遺史>, <설사당꽃이 떠나고 있다>, <금정산>, <돌 속에 꽃이 핀다>, <곰팡이를 뜯었다>, <엔지세상>, <까치똥>, <통영 벅수>, <어쩌면 한갓지다>, <어깨에 쌓인 무게는 털지 않는다>, <꽃도 물빛을 낯가림 한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