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흙담길을 걷다 - 허림

마루안 2018. 6. 12. 21:36

 

 

흙담길을 걷다 - 허림


오래된 바람이 분다
망우 지고 아버지 밭으로 나가시고
들밥 이고 어머니 논으로 나가신다
그림자와 땅뺏기 하다가
은숙이가 소꿉놀이하자고 조른다
흙담장 아래 햇살 받아 살림 차린다
나는 남자라서 아빠가 되고
너는 여자래서 엄마가 된다
무엇이 행복했는지 웃는다
웃다가 어른처럼 싸우고
싸우다가 어머니처럼 울고

흙담장 아래 쪼그리고 앉으면
오래된 바람은 따뜻하다
눈이 자주 내렸다
아침이면 길과 맞닿은 모든 길은 환히 열렸다
흙담장 너머 달 뜨고
백 번이 넘는 계절이 지나갔다
아버지는 취해서도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는 자주 흙담장 아래
다 풀린 실타래마냥 앉아 계신다
오래된 바람이 분다


*시집, 말 주머니, 북인

 

 

 

 

 

 

장칼국시 - 허림


흐린 날은 저녁도 일찍 든다
어머니는 밀가루 반죽에 콩가루 넣고 치대고
어린 누이는 그 옆에서 감자 까고
나는 울 밖에서 두 주먹만한 호박과 호박잎 따고
배차밭 옆에서 아욱과 고추 따온다
늙은 호박만한 국시 반죽이 홍두깨에 감겼다 풀린다
조금씩 얇게 밀리고 드디어 쟁반만큼 넓어졌을 때
밀가루 고루 펴 바르고 반으로 반으로 접어 썬다
어린 누이와 귀퉁이 반죽을 솔가지에 구워먹는 동안
어머이는 노각지에 장을 풀고 감자는 삐지고
아욱은 박박 비벼 씻어 넣는다
두루반에는 열무김치 한 대접과 숟갈 젓갈 아홉 벌
아부지는 뒤란에서 미섭싸리를 뫄 태우면서 자꾸 부엌을 엿본다
어머이는 솥뚜껑을 열고 한자배기 가득 국시를 퍼 담아 뒷마루로 간다
나는 마당에 서서 나팔 손을 해 저녁을 알린다
"할아버지! 아부지! 큰성! 저녁 진지 드시래유!"
"오냐!"
어머이는 부른 국시를 어둑어둑하도록 드셨다


 


# 허림 시인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강릉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와 1992년 <심상>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울퉁불퉁한 말>,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