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일홍, 헐벗으며 피는 꽃 - 배정숙

마루안 2018. 6. 12. 21:13

 

 

백일홍, 헐벗으며 피는 꽃 - 배정숙


토담 아래로 허물어지는
하루치의 햇살이 쪼아대는
네 목덜미에서
휘청거리는 살냄새가
어지러웠다

빛은 가슴에다 쟁이지만
어스름한 저녁은
수족이 묶여서 시작되는 오뉴월이
을씨년스럽고 추웠으며
마마님이 창궐한 듯
보릿고개는
지푸라기 같은 한숨으로 다스려지지 않았다

누더기처럼 두른 앞치마에 묻어오는
풋보리 냄새
그 얇고 투명한 결을 탐하는
굶주린 헛것들이
이무기처럼 들어앉아 꿈속을 어지럽힐 때마다
꼬질꼬질 접었던 꽃잎을 하나씩 여는
꽃이 있었다

쥐눈이콩 같은 분꽃 씨는 곁에서
물색없이 영글고
헛소문마냥 빈손으로 나서는 등굣길
사친회비 대신 받들고 가던
닭똥 같은 누이의 눈물을 기억하는 것이
힘에 부쳐서
피는 듯 지는 듯
입술 달막거리다가 저무는
꽃이 있었다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무지몽매의 뭉치와 씨름하며
무채색의 노년기로 평생을 살아가는
슴베 깊은 꽃


*시집, 나머지 시간의 윤곽, 시로여는세상

 

 

 

 



노을이 삭은 뼈를 읽다 - 배정숙


벼 바심을 하고 난 끝에 어머니가 바람에 검불을 드리고 계셨다

난봉꾼 아들하고 바람은 밤이 되면 자는 거라고 바람이 자기 전에 마음은 급한데 알곡 몇 알 발밑에 떨어질 뿐 가벼워진 어머니의 칠십 생 부스러기만 바람에 날려나간다
각질처럼 달라붙은 돼먹지 못한 새끼들 위해 헛걸음만 걸어온 다리 뼈마디 사이로 노을이 지나간다 방아깨비 몸뚱이 사뿐사뿐 순하기만 해서 보름사리 그 밤까지 순하기만 해서 아침 방아 찧어라 저녁 방아 찧어라 고분고분한 저 삭정이 다리
울컥울컥 선혈을 게워내는 석양의 바다로 침몰하는 늙은 목선 하나

허깨비와 다름없는 어머니의 뼈마디 성근 구멍에서 나는 바람 소리는 저무는 저녁 가까스로 뛰고 있는 슬픔의 박동소리라는 것을
서쪽 하늘 마당귀에 매달려 사정없이 끌려가는 저 뒤축이 닳아버린 당신의 그늘도 눈시울이 붉어진 노을 너머서는 드리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은 저녁에 안다




# 배정숙 시인은 1952년 충남 서산 출생으로 신성대, 한국방송대를 졸업했다. 2010년 계간 <시로여는 세상>으로 등단했다. <나머지 시간의 윤곽>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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