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실낙원의 밤 - 김안

마루안 2018. 6. 17. 20:32

 

 

실낙원의 밤 - 김안


내가 만든 낙원과 당신이 만든 낙원과
우리의 낙원들이 만든 비참함과 우리의 낙원을 용서하는 밤 위로 쌓이고 쌓이는 다른 이들의 밤의 빛깔과
낮에 보았던,
밟혀 죽은 지렁이와
여왕을 배불리기 위해 지렁이를 해체해 옮기는 개미 떼
내일이면 우리는 이 낙원에 얼마나 남겨져 있을까
이리 와, 조금 더 내 안으로 들어와 누워 있어도 돼
창밖에서
우릴 쳐다보고 있는 저 사람들은 우리보다 빨리 늙을 테지, 늙어 죽거나 자살할 테지만
차라리 우리 똑같은 병으로 죽자, 죽어버리자던
낮에 보았던,
밟혀 죽은 지렁이 같던 당신의 입술과
우물우물, 씹어 삼키는 밤의 정충들
우리의 낙원들이 시간의 억센 손아귀에 질질 끌려가기 전에
기억이 찌그러들기 전에
차라리 우리 함께 저 창문 속으로 사라져버릴까
유령의 발자국으로 우리의 몸 밖으로 걸어 나가던 낙원들과
비참한 당신의 적막들과 창을 뒤흔드는 기억들과
끈적거리는 모든 것과
함께


*시집, 미제레레, 중앙북스

 

 

 

 

 

 

수목장 - 김안


밤새 저 나무에 당신의 머리를 매달았는데 누구일까
몸 없이 매달린 당신의 머리들 바람이 불 때마다 표정이 바뀌는데 누구일까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당신을 증오하는 사람
당신이 경멸했던 사람
누구일까
나무 아래에서 온종일 당신의 머리를 보고 있는데 누구일까
함께 보낸 가학의 시절
함께 읽던 피안과 이데아와 영겁에도 불구하고
누구일까
누구의 우주가 부족했을까
누구의 의지가 약했던 걸까
밤의 흰 발자국은 누구를 데리러 저리도 먼 곳에서부터 왔을까
누구일까
혼자 굶고 혼자 약을 털어 넣고
혼자 뛰어내리고
혼자 죽어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소식
누구일까
몸이 나무가 된 사람은
수백 개의 머리를 매달고 소리 없이 퍼지는 비명의 주인은

 

 

 

 

 

# 김안 시인은 1977년 서울 출생으로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으로 <오빠생각>, <미제레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