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 - 하종오

마루안 2018. 6. 15. 22:41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 43 - 하종오



안락사라든가 존엄사라든가
죽음을 택하는 영국인은 스위스로
프랑스인은 벨기에로 간다고 한다


스스로 먹을 수 없이
스스로 입을 수 없이
스스로 생각할 수 없이
숨이 쉬어지는 상태가
숨이 멎는 상태로 바뀔 때까지
타의로 겨우 살아 있으라는 것은
사람이기를 원하지 말라는 것,
내 할아버지할머니도 아버지어머니도
그렇게 죽었다


안락사나 존엄사를 하려는 사람은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를
직접 만들고 직접 지키는 사람,
스위스인과 벨기에인은
자신과 타인의 죽음과 친할 줄 아는 것 같다


나 혼자 보지 못하고
나 혼자 듣지 못하고
나 혼자 말하지 못하면
그렇게 죽도록 자식에게 부탁해 둔다



*시집,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 도서출판b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 8 - 하종오



나는 지천명을 넘기고서도
사형(師兄)을 만만하게 대했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더 많고
연조가 있어도
나이대접하지 않았다


내가 시건방지게 언행을 해도
사형은 너무나 천연하였다
연장(年長)으로서 당연한 맘가짐이려니 하다가
내가 그 나이 되었을 때
연하年下가 시건방지게 언행을 하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낫살을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관대해지는 건 아니었다


사형은 환갑에 죽었다
나는 그 나이보다
삼 년이나 더 살아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도 너그럽게 대하지 못한 채
살날을 헤아리는 자신을 탄식하다가
죽음에 다가가는 절차가
이런 것이 아닌가 의구한다
사형이 지금 내 나이라면 자탄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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