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야도에서 - 곽재구

마루안 2018. 6. 16. 21:50



백야도에서 - 곽재구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뜨거운 일


실비 속으로
연안여객선이 뱃고동과 함께 들어오고


붉은 꽃망울 속에서
주막집 아낙이
방금 빚은 따뜻한 손두부를 내오네


낭도 섬에서 빚었다는 막걸리 맛은 융숭해라
파김치에 두부를 말아 한입 넘기는 동안


붉은 꽃망울 안에서
아낙의 남정네가
대꼬챙이에
생선의 배를 나란히 꿰는 걸 보네
운명의 과녁을 뚫고 지나가는 불화살


늙고 못생긴 후박나무 도마 위에 놓인
검은 무쇠칼이 무심하게 수평선을 바라보는 동안
턱수염 희끗희끗한 사내가
추녀 아래 생선꿰미를 내걸고 있네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뜨거운 일


물새 깃털 날리는 작은 여객선 터미널에서
계요등꽃 핀 섬과 섬으로 연안여객선의 노래는 흐르고


대꼬챙이에 일렬로 꿰인 바다
핏기 말라붙은 어족의 눈망울 속
초승달이 하얗게 걸어들어가는 것을 보네



*시집, 와온 바다, 창비








와온 바다 - 곽재구



해는
이곳에 와서 쉰다
전생과 후생
최초의 휴식이다


당신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
구부정한 허리의 인간이 개펄 위를 기어와 낡고 해진 해의 발바닥을 주무른다


달은 이곳에 와
첫 치마폭을 푼다
은목서 향기 가득한 치마폭 안에 마을의 주황색 불빛이 있다


등히 하얀 거북 두마리가 불빛과 불빛 사이로 난 길을
리어카를 밀며 느릿느릿 올라간다


인간은
해와 달이 빚은 알이다


알은 알을 사랑하고
꽃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고


삼백예순날
개펄 위에 펼쳐진 그리운 노동과 음악


새벽이면
아홉마리의 순금빛 용이
인간의 마을과 바다를 껴안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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