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밤중에 자다가 깨는 것은 - 박미란

마루안 2018. 6. 26. 19:40



한밤중에 자다가 깨는 것은 - 박미란



빈손으로 가던 적막이,
내 몸 친친 감고
은하의 깊은 골짜기로 흐르기 때문이다


검고 긴 머릿단 치렁치렁 끌고 가던
적막이,
하얗게 세어버린 은발로
내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는 것은


누가 내 이름 불러서가 아니라
한 번도 잠든 적 없던
밤이,
적막의 이름을 목이 쉬도록 부르기 때문이다



*시집,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문학의전당








비단길 - 박미란



밤은 그냥 가지 않고
기억을 품고 가려 한다


무엇 때문에 어둠에서 새벽이 태어나고
무엇이 이 공간으로 밀려오는가


매일 밤이면서 새벽이고
낮이면서 저녁인 시간들
무엇 때문에 하루는 또 하루를 물고 가는가*
죽은 별이 살아나 눈썹 위에 비틀리는가
무엇 때문에 죽은 별이 다시 죽어
입술은 루주를 덧칠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화장을 떡칠하는가


모든 밤이 서럽지 않으면서 서러운
화려하고 쓸쓸한 잔칫날인데
흰 천에 형형색색 실을 놓아
끝없는 밤으로 이어놓는가
새벽을 푸르게, 뼈마디 쑤시도록 푸르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밤과 새벽이 멀리 떨어진 듯 이어져
또 하루가 무단결근 없이 이리도 밝아오는가



*파블로 네루다의 시 <어디냐고 묻는다면>에서 변용.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 때 묻은 껌 - 김이하  (0) 2018.06.26
사랑이라는 것 - 이강산  (0) 2018.06.26
포르노 배우가 꿈인 딸 - 박남원  (0) 2018.06.26
파파 염소의 노래 - 최준  (0) 2018.06.25
야적된 가슴 - 강시현  (0) 2018.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