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가끔 자습을 이렇게 부르지 - 채풍묵

마루안 2018. 6. 26. 23:08

 

 

나는 가끔 자습을 이렇게 부르지 - 채풍묵


선생 왈, 자위란 자기 스스로를 위하는 것이니
학문을 닦고 게다가 익히기까지 한다는 위선보다야
차라리 자신을 위해 하는 행위가 더 낫지 아니한가
평등하게 배운 대로 치자면 오늘날 우리들 공부란
아마도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자신의 자위행위
공부는 그리 근엄하지도 경건하지도 않은 것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것
그러므로 자습을 한다는 것은 자위를 하는 것이지
단지 이름을 붙인다면 야간자율학습 아침자율학습
조용히 하자 입으로 하지 말자 그렇다고 맨손으로 하지 말자
집중이 안 되면 연필 같은 도구를 사용하자 청결하게 하자
샘처럼 매일 솟는 온갖 주의점이 끈적끈적 감독을 한다
그러나 아무도 알맞게 하라는 주의는 주지 않는다
자습 대신 건강하게 땀 흘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결코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지만
그게 그래, 알다시피 적당히 라는 것이 무척 어렵거든


*시집, 멧돼지, 천년의시작



 



그리움의 사회화 - 채풍묵


눈먼 인생은 인생을 논할 때만 거기 있곤 한다
늦도록 술을 마시고 푸르스름한 새벽이 멀리 기웃거릴 무렵
거리로 나서면 어느덧 인생은 없고 드문드문
눈이 쾡한 그리움 하나 낯선 그리움 몇몇 걷고 있을 뿐이다
참, 그리움들, 무엇을 바라 어디론가 가는 것인지
방문을 여니 겨우 허리에 차는 딸의 잠이 누워있고
다른 방엔 늦은 숙제와 함께 누운 아들의 철없는 사회화
집 안 풍경은 나를 문득 돌아보게 하고
어느새 나는 결혼도 해서 한 집의 가장인 셈이고
한 달씩 생명줄을 월급으로 이어 지탱한다
아직 죽지 않을 것을 의심하지 않듯이
아직 직장에서 떨려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할부로 물건을 사기도 했고 대출 통장도 갖고 있다
갚아야 할 것을 정해 얼마간의 삶을 저당 잡히고 있다
모든 정해진 틀 튼튼한 영속성 안에서
나는 내가 아니다
남이 물려주고 간 빈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누군가 이미 살았을 몫을 반복하는 또다른 남이다
그런 세상, 사람을 영원히 보내고도 변함이란 없는 단단한 세상
그리하여 나는 남김없이 소진하는 사랑을 꿈꾸지만
사랑조차 먼저 시작한 자의 꽁무니를 따라가게 만들어
제 몫의 사랑이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다다를 곳 모르는 그리움마저 사라지면
나는 또 무엇을 바라 하루라는 언덕을 넘을 것인가
어떻게 빈틈없이 채워질 빈자리로 남을 것인가
이런 생각에 다다를 즈음
남과 다른 내가 있다는 오만은 저만치 물러나고
기실 서로 다른 온전한 삶이란 없다
속으며 숱한 가지를 뻗어가는 인간의 사회화일 뿐
술이 깨면서 날이 밝으면서
사회화가 덜된 내 그리움은 다시
아무도 모르는 오늘 하루를 향해 집을 나선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쩌다 아주 가끔 - 류경무  (0) 2018.06.27
마음의 달 - 천양희  (0) 2018.06.27
사랑, 때 묻은 껌 - 김이하  (0) 2018.06.26
사랑이라는 것 - 이강산  (0) 2018.06.26
한밤중에 자다가 깨는 것은 - 박미란  (0) 2018.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