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 저녁은 - 김이하

마루안 2018. 7. 10. 20:17

 

 

이 저녁은 - 김이하

 

 

가을 이 저녁은

나도 무슨 색으로 물들고 싶다

저기 저 들의 사람들

이제는 표정 없이 허수아비 되어

가슴 툭 터진 방천, 말뚝이 되어

불콰한 햇살과 한잔하고

햇살 들다 지나간 지 한참인 마루에

바람에 들다날다 오갈 데 없는 낙엽처럼

쓰러진다, 가을 이 저녁은

더 이상 두드릴 콩동도 없이

더 이상 까발릴 흥부네 박덩이 같은 것도 없이

너무도 심심하고, 무료하고, 삶은 추워서

뜨거운 눈물로도 얼굴 데워 보지만

꽃 피고, 잎 푸르다 먼 산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물들어 버리는

나무 한 그루의 빛도 닮지 못하고

저 들의 빛까지도 잃어버리고

그만 어둠에 휩싸이고 마는데

가을 이 저녁은

나도 그만 어둠에 묻혀

늦은 군불에 도깨비처럼 타는 불빛

그 따숩고 아련한 빛이면 좋겠다

 

 

*시집, <춘정, 火>, 바보새

 

 

 

 

 

 

목련 아래서 봄을 기다린다 - 김이하

 

 

어느덧 내가 가을이다

순백으로 빛나던 봄은 오래 전

찰나에 가버리고

흐물흐물해진 몸을 끌고

힘겹게 여름을 건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노오란 감이나

붉디붉은 대추알 같은 씨 하나

남아 있지 않다

 

누구도, 아무도 우러러주지 않는

이 가을

명꽃 같은 구름 입에 물고

눈 찡그리면

어느 새 목련 나무 아래 닿구나

 

그러면 어느덧 나는 가을이구나

누렁누렁 변해가는 잎들

목이 으쓱한데, 아니다

구름으로 비단을 짜는 눈부신 손

봄을 준비하는 게 아니냐!

오면 그뿐인 봄을,

 

 

 

 

# 김이하 시인은 1959년 전북 진안 출생으로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타박>, <춘정, 火>, <눈물에 금이 갔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