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해후 - 이종형

마루안 2018. 7. 12. 21:57



해후 - 이종형



한 아버지를 가졌으나 어머니가 다른 두 사내가
백 미터 전부터 한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경주군 강동면 단구리 버스정류장
고작 서른 몇 살에 세상 뜬 아버지를 둔, 가여운 사내 둘이 손을 맞잡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바라다보는데
너무나 닮아, 차라리 무서우리만큼 빼다 박아
다른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어난 내력도
서로 못 보고 살아온 수십 년 세월도 단숨에 비껴가는 것이었다


안부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이리 몸성히 잘 지내고 있었으면 된 거지
이렇게 만날 수 있어서 고마운 거지
중년 사내 둘이 움켜쥔 손을 놓지 않은 채
어색하게 걸어가는 동안


하이고야 우예 이리 닮았노
피가 무섭긴 무서운기라
이웃들, 일가붙이들 하나둘 달려 나와
종택(宗宅)으로 가는 골목길이 소란스러워지는데


두 몸에 스며든
연민의 뿌리까지 빼다 박은 형제가
자꾸만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








아버지 - 이종형



이제 놓아줄 때가 되었다
그만 미워해라
곰곰 생각해보면 아들이 자라 아버지가 되고
자손들 오뉴월 버드나무 가지처럼 뻗어가는 기쁨을
다 누려보지 못했으니 불쌍한 양반 아니냐
겨우 세 살 먹은 너를 두고
요절한 네 아비는 또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미워한 적은 없었지만 원망은 몇 번 했고
살아오는 동안 가끔씩 그리웠을 뿐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면 착한 아들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잔 한 장 남겨놓지 않은 당신 때문에
삶과 불화한 세월이 길었다


내 몸에 깃든 사소한 버릇까지 죄다 당신을 닮았다는데
이제 나를 미워하는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





# 시인의 삶이 그대로 녹아든 시가 가슴을 시리게 한다. 세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던 세월이 있었다. 훗날 배다른 손 위 형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중년이 된 형제가 상봉을 한다. 제주의 상처를 이겨내고 시심으로 잘 길러낸 시인의 시가 절절하다. 나도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시인과 동병상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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