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백로 무렵에 - 성봉수

백로 무렵에 - 성봉수 돌림병처럼 별안간 밀려온 산란(散亂)하지 못하는 흐린 날의 낙조 여름의 단호한 추락은 기다린 이의 황홀한 절망이지 가을이 왔다고 가슴을 열어 쓸쓸함 여민 사람들 문을 나서는 나를 막아서는 지지 않는 꽃과 당당하게 푸른 은행잎과 기꺼이 하늘을 비티고 선 모가지들과 발치 끝에서 머뭇거리는 백로 무렵의 어설픈 가을 답신 없는 연서에도 쓸쓸하지 않을 만큼 아직도 견딜 만한 일이다 *시집, 바람 그리기, 책과나무 고독(苦獨) 10 - 성봉수 별을 본다 억수 광년 전 나선 사내 새벽 장독대 물그릇에 이슬로 담겨 신기루처럼 잊고 섰더니 허상같이 낮을 태우고 빛 먼지도 남김없이 다 태우고 소주로 삿갓을 쓰고 앉아 별을 본다 온 곳도 갈 곳도 없는 끝. 사내는 없다 # 성봉수 시인은 1964년 충..

한줄 詩 2019.09.07

해마다 꽃무릇 - 이규리

해마다 꽃무릇 - 이규리 저 꽃 이름이 뭐지? 한참 뒤 또 한 번 저 꽃 이름이 뭐지? 물어놓고서 그 대답 듣지 않을 땐 꼭 이름이 궁금했던 건 아닐 것이다 꽃에 홀려서 이름이 멀다 매혹에는 일정량 불운이 있어 당신이 그 앞에서 여러 번 같은 말만 한 것도 다른 건 생각조차 안 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픈 몸이 오면 슬그머니 받쳐주는 성한 쪽이 있어 꽃은 꽃을 이루었을 터인데 이맘때 요절한 그 사람 생각 얼마나 먹먹했을까 당신은 짐짓 활짝 핀 고통을 제 안색에 숨기겠지만 숨이 차서,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것 저 꽃 이름이 뭐지?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때가 되면 - 이규리 천강성이란 별은 길방을 비추기 위해 흉방에 위치한다는데, 애지중지하던 일 그거 ..

한줄 詩 2019.09.06

바람의 몸이었다 - 김남권

바람의 몸이었다 - 김남권 바람이다 아니 바람의 몸이었다 당신은 어느새부턴가 몸 안의 기운이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손바닥에 남은 한 줌의 공기만 당신 것이 되어 버렸다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두 발로는 버거워 지팡이를 짚고서도 비틀거린다 땅에서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서 발을 옮기는 것처럼 허공에 오래 머무르는 발걸음이 바람 속에 점을 찍는다 당신이 이승을 떠나기 위한 말줄임표... 자유로운 몸짓의 마지막 쉼표, 하나가 눈을 뜨고 있다 자식 여섯을 잉태하고 키우는 동안 당신의 전부를 먹이고도 양파껍질처럼 남은 것을, 세상의 모든 생명을 길러 내는데 쏟아 부었던 모성마저 단풍의 절정에서 낙엽이 된다 아, 바람이다 당신은 아니 바람의 몸이었다 당신은 *시집, 바람 속에 점을 찍는다, 오감도 어른이 될 ..

한줄 詩 2019.09.03

누가 글썽인다 - 조항록

누가 글썽인다 - 조항록 어스름 새벽은 무겁다 완장을 차고 나의 멱살을 잡아채는 시간 난수표 같은 오늘을 여는 것이 길 없는 외길이다 내가 나를 속이는 일이 점점 쉬워지고 눈물은 잊은 지 오래 눈물을 잊은 가수가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주섬주섬 적막을 챙겨 들고 문을 나서면 검푸른 폐허에 발이 푹푹 빠지는 불안 나는 굳이 나로부터 고립되어 새벽별 앞에 하소연을 삼키고 속절없는 짐승인 것을 명심한다 맨발의 짐승이 속울음을 그렁대며 걸어가는 천로역정 거기 모르는 곳에서 내가 잊은 눈물로 누가 글썽인다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우리 만남은 - 조항록 너의 흉터가 담긴 소포를 받았다 발신지는 추억이었다 어디쯤에 빗발이 흩날리는지 한쪽 귀퉁이가 살짝 젖어 있었다 하염없이 몇 세기가 흘렀다 정말 그..

한줄 詩 2019.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