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해마다 꽃무릇 - 이규리

마루안 2019. 9. 6. 19:59

 

 

해마다 꽃무릇 - 이규리


저 꽃 이름이 뭐지?
한참 뒤 또 한 번
저 꽃 이름이 뭐지?

물어놓고서 그 대답 듣지 않을 땐 꼭 이름이 궁금했던 건 아닐 것이다

꽃에 홀려서 이름이 멀다
매혹에는 일정량 불운이 있어

당신이 그 앞에서 여러 번 같은 말만 한 것도 다른 건 생각조차 안 났기 때문일 것이다

아픈 몸이 오면 슬그머니 받쳐주는 성한 쪽이 있어
꽃은 꽃을 이루었을 터인데
이맘때 요절한 그 사람 생각
얼마나 먹먹했을까

당신은 짐짓 활짝 핀 고통을 제 안색에 숨기겠지만
숨이 차서,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것

저 꽃 이름이 뭐지?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때가 되면 - 이규리


천강성이란 별은 길방을 비추기 위해 흉방에 위치한다는데,

애지중지하던 일
그거 허방이었다는 거
복날 개장수 마이크 소리라는 거

때가 되면 알까
때가 되면 웃을까

초가을 햇살이 이파리를 하나하나 핥으며 하는 말
저 끝으로 가봐
이봐
한 발짝 더 가봐

내 날들은 여직
잘못 찾은 무덤 앞에서 통곡한 것이나
그 무덤 아닌 줄 알면서 엎드린
누추한 반복일 뿐

동쪽을 가리지 않기 위해 서쪽에 가서 앉는

그런 때

정말
그런 때




# 이 시는 문예지에 발표한 시와 나중 시집에 실린 시가 많이 다르다. 성형 수술을 너무 많이 해서 같은 제목에 다른 시라 해도 되겠다. 퇴고를 거듭하고 助詞 하나 점 하나까지 신경을 쓰는 시인의 완벽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시를 쓸 당시의 감정이 녹아 있는 원본 시가 가장 빛나는 것이 아닐까. 독자도 처음엔 지나쳤던 시가 나중에야 눈에 들어올 때가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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