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 생을 견디는 방식 - 이근일

마루안 2019. 9. 5. 21:55



이 생을 견디는 방식 - 이근일



아프고 난 뒤

찬밥만 먹는 사람이 있었다


죽음이 너무 차갑지 않게, 하고

그가 말했지만 나는 그것을

자학의 비만으로 이해했다


날마다 구덩이를 파는 개가

점점 골짜기를 닮아간다


혼백이 맘대로 드나드는 그 문을 떠올리는데


달고,

톡 쏘는 냄새 사이를 굴러다니는 양파가

끝내 제 침묵에 갇히고 만다.


속절없이 말라가는 시간에 대하여

허연 눈물 뚝뚝 흘리던 빨래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저녁의 줄에서

나울나울 춤을 추는 사이


방금 입에 문 씀바귀무침이

내 혀를 잡아당기며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독하게,

또 향기롭게



*시집, 아무의 그늘, 천년의시작








해 질 무렵 - 이근일



버찌가 흘린

검은 피로 낭자한 출근길


그녀는 떠올리는 것이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려다

갑자기 길을 잊은 사람, 그렇게

기억을 쏟아낸 사람이


빠져버린 검은 허방에 대하여


벌써 몇 년째 요양원 신세를 지면서도

그 사람은 해 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짐을 꾸리고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인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사람 곁엔

늘 그날의 시간이 머무르는 것일까


오늘도 병실 유리창에 석양이 걸리자

그녀는 단호한 얼굴로

문 앞을 지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그날이 있듯, 그녀는 석양을 지우고

오래된 핏자국 같은

그 사람의 그날을 지우고 싶다.





*시인의 말


오래도록 내 통증을 어루만지던 손길을 기억한다. 그처럼 어느 바닥에 서린 햇빛의 그 차가운 표정은 쉬 잊을 수가 없다.


잊지 않으려고, 혹은 잘 잊으려고 오늘도 무언가를 쓴다. 빛과 그늘 사이에서.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신 - 김언  (0) 2019.09.06
신폭(神瀑)에 들다 - 우대식  (0) 2019.09.05
바람의 몸이었다 - 김남권  (0) 2019.09.03
누가 글썽인다 - 조항록  (0) 2019.09.03
별똥별 - 김태형  (0) 2019.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