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유랑의 풍습 - 박지웅

마루안 2019. 9. 8. 19:15



유랑의 풍습 - 박지웅



전생에서 내 가져온 재물인가
슬픔에게 바치는 서글픈 뇌물인가
한숨이여, 기억이 남긴 몹쓸 유산이여
무너진 흙더미 같구나, 내 불쌍한 행복아
내 생을 출발시킨 무관심한 봄은
어디로 갔는가, 가벼운 협박처럼 나를 쫓는
햇살 피해 나 울적한 그늘에 앉았네
가을은 계급장 떨어진 보병 같은 나무를
내 앞에 세워두고 또 가버리고
동의하지 않은 이 유랑에 대해
초췌한 철학은 한 번도 설명하지 못했네
나 공연히 일어나 이생으로 넘어왔네
나는 왜 나에게 죽음을 전수했는가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문학동네








미개한 문명 - 박지웅



가을비다
우리 모두 실의에 빠지자
얼마나 한심한가
희망을 설득하는 짓이란
우리가 이룩한 문명이란
얼마나 미개한가
그의 후원을 믿지 않으니
벌레처럼 기어가
나는 종교를 바꾼다
지금은 희망으로부터 대피할 때
마음 놓고 수심에 잠길 때
결국 절망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통곡이 나타나 구원할 것이다
이 고약한 반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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